나비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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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장자」중에 나비얘기가 나오는 곳은 내편 「제물론」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도 바로 이제물론과 비슷하다는 「설」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말하자면 장자와 똑같은 원리를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장자는 기원전 몇세기전에 이미 그것을 철학적으로 규명했다. 어느날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된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어디로보나 나비임에 틀림없었다. 곧 장자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장자는 다시 생각한다.
『지금 나는 사람으로서 나비였음을 꿈꾸었는지, 내가 나비인데 사람이라고 꿈을꾸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 대목은 장자의 극치를 보여주는 절구이다. 인간에게는 「대각」이라는「오」의 경지가 있다. 이경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깨달았다는 인생은 실상 큰꿈이었던 것을 안다.
장자의 달관한 경지는 일대 서사시를 이룬다. 그는 인생의 부귀영화도 모두 과감없는 환영으로 여긴다. 한잠의 꿈은 생애에 비하면 한순간에 지나지 않듯이, 이 짧은 생은 영겁의 사와 비하면 깜박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사람이 죽는 것은 꿈을 꾸다가 깨는 것과무엇이 다를까. 죽기를꺼려하는 아집의 인간들에게는 경종을 주는 말이다. 「현재」는 실로 하잘 것 없는 순간인 것이다.
윤이상씨작품 『나비의 꿈』은 바로 이장자의 사상에서 발상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오페라」로 어떻게 승화되었는지는 자못 궁금하다. 그가 옥중에서 유독 장자의 그와같은「달관」에 매혹되었던 심중은 우리로서는 알듯 모를 듯하다. 인간의 역경은 장자식으로 말하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대각」의 뜻과도 통한다.
윤씨의 이번 작품이 서독에서 그처럼 격찬을 받은 것은 윤씨의 「대각」속에서 새로운 광채를 발견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자에겐 이런 면모도 있다. 초나라 재상의 초빙을 받았을 때, 그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도살장의 소(우)와 같이는 되기싫다는 것이다. 스스로 국가 사회를 냉시하고 「시니시스트」(견유가)로 초연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장자의 한계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윤이상씨는 이제 「대각」의 경지에서 진일보해야할 것이다. 그의 예술은 이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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