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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최대 위기|파리회담성립의 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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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런던 타임즈=본사 독점전재]비극의 「존슨」행정부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한사람의 신념과 용기가 아니었던들 오늘날 「베트남」전쟁의 방향은 훨씬 달라졌을 거라는 사실이 2월9일자 「런던·타임즈」의「헨리·브랜든」기자에의해 뒤늦게밝혀졌다. 그 사람은 퍽「아이러니컬」하게도 월남전에는 강경파로 알려진「클라크·클리포트」전국방장관이란 사실에 흥미는 더욱 고조되고있다.
그러니까 「클리포트」는 작년3월「베트콩」의 구정공세로 미국의 조야가 커다란 충격 속에 허덕이고 있을때 「맥나마라」씨의 후임으로 행정부에 들어섰다.

<구정 공세후 논란>
68년3월 「베트콩」구정공세의 강력한 타격에 부닥친「웨스트모얼랜드」장군은 미군20만의 증파를 요구했고 이것은 합참의장 「휠러」장군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있었다. 이증파안을또 「러스크」국무장관, 「헬름」중앙정보부장「테일러」장군, 「번디」국무성차관등이 강력히지원했고 「존슨」대통령자신도 이에 찬성하고있었다.
따라서 이증파안을 혼자서 반대한다는일은 그의 설득력이 아무리 능란한 「클리포드」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증파요구가 3주째 연구되는 동안「클리포드」의 결심은 굳어졌다. 「존슨」이 제시한 제한조건안에서 전쟁에 군사적승리를 가져올수 없다는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이 제한조건이란 월맹진격, 「라오스」·「캄보디아」에의추적권확대, 「하이퐁」항봉쇄를 포함했는데, 이에대해 「클리포드」자신도 거의 대통령과 의견이일치하고있었다.
드디어 「웨스트모얼랜드」장군의 요구에대한 보좌관들의 보고서가 작성되는 순간, 「클리포드」는대담하게 증파를 반대하고 나섰다.

<존슨은 상심까지>
모두들 격렬히 그를반대했다. 증파는 전쟁의 가열을 가져오고 가열은 더많은 희생만을 수반한다는 그의 반론에 나머지사람들은 승리를 위해서는 증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맞서좀처럼 결론은 내려지지않았다. 말하자면 전쟁을 놓고 전쟁이 벌어진셈이다. 「클리포드」 의 증파반대에 부닥친 「존슨」대통령은 크게 상심, 2차대전 「쳄벌린」영수상의 망령을 되살려 유화정책을 경고하고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평화를 바로 전장에서 획득해야한다고 역설하기에 이르렀다. 「클리포드」는 이때를 회상하여 친구에게 『그것은 고독하고 미치게하는시절』이었다고 술회했으나 하여간 그의 집요한 반대를 꺾을수 없게되자 이른바 「원로정치가회의」를 「존슨」은 소집했다.
「애치슨」·「번디」·「리지웨이」·「브레들리」·「머피」·「포르타스」대법관·「아더·딘」·「조지·볼」등이 참석하는 이회의는 67연가을이래 한번도 소집된일이 없었다.

<완전단폭도 주장>
「클리포드」국방장관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애치슨」 과 「번디」 뿐이었다. 계속 의견이 분분한가운데「존슨」의 심정은 더욱 괴로와졌다. 「클리포드」는 증파반대와 완전단폭을 계속 밀고나갔다. 이에 「존슨」이 반대하자 「클리포드」는 20도선단폭을제의하게되었고, 이것이 협상에의 건전한 출발이 될수있다는 주장을 설득시킴으르써 비로소 증파도 거부하게 되었다. 개전이래 군부의 증파요청이 부결된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존슨」대통령으로 부터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언질을 3월28일 받은 「클리포드」는 즉각 자기의 제의를 문서화시켜「존슨」의 3·31 대통령불출마성명에 이를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존슨과 친교깊어>
무엇보다도 「존슨」이 그의 제안을 한참 끌다가 결국 받아들인데는「클리포드」가 그의 친한친구일뿐 아니라 애당초 월남전에는 강경파로서 정치적으로 신임할수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거로 알려졌다.
이렇게 힘들여 「존슨」을 설복한 「클리포드」는 얼마안가 제2의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면단폭없이 「하노이」가 실질토론에 들어갈수없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클리포드」는 다시한번 대통령을 움직이기로작정했다. 그는 「존슨」을찾아가부분단폭이 커다란 분위기 완화를 가져왔으며이제전면단폭을실시할경우 양측은 한발짝 한발짝 본격적화평회담에로 전진할수 있을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런데 이때 월맹측의 모호한 반응에 우신반의하는 「워싱턴」의 공기에 은근한 활소를 불어넣은것은 엉뚱하게도 「모스크바」측이었다. 소련「채늘」은 미국이 단폭을 시행할경우 「하노이」가 이에 어떤형태로 대응할거라는 암시를 보내주었다.

<사이공에 압력도>
그러나 「하노이」가 「워싱턴」의 촉각을 포착하자 이번에는「사이공」이 고집을피우기 시작했다. 얼마전부터 「사이공」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는 미국의 전쟁부담이 언제 없어질지 알수없다고 「클리포드」는 생각해왔었다. 따라서 「파리」회담에의 참석을 종용하기위해 「사이공」에 정치적압력을 가해야한다는말에 「존슨」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국방성과 백악관을잇는 전화통은 한참동안울리지도 않았다한다. 「클리포드」는 이제 백악관·국무성·국방성등 정부「채늘」을 모조리 뛰어넘어 스스로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사이공」 에 압력을 가할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허가에 구애됨이없이 기자회견·강연등을통해 「사이공」을 맹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대통령은 얼마나 불쾌한지 「클리포드」장관을 단독으로 만나지 않고, 그가올때는 늘 친구들을 불러 좌석을 묘하게 만들었다는설이 있다.

<유산은 평화가교>
「존슨」이 이렇게 고집을 부린데는 행정부 임기가 다한때 어떻게해서든 미국은 종전을 교섭함에있어 힘의우위를 확보해야한다고 믿은데있는것같다.
그러나「클리포드」는행정부의유산이 비단 힘의우위에만 있는게아니라 한발더 앞서 평화의 조건을 성숙시켜주는데 더욱큰 영예가있음을 역설한것이다.
오랜 지기에다 그를 입각까지시킨 「존슨」은 「존슨」대로, 「클리포드」는 그 나름대로 인간적인 고뇌와 국가의 장래가 교착하는 가운데, 말썽많은 행정부는 「파리」화평의 기틀을 마련해놓고 조용한 막을 내린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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