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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실의 한몸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769년 「제노아」령에서 「프랑스」령토가 된 1년후 「코르시카」서 탄생한 「나폴레옹」은 26세때 「이탈리아·오스트리아」연합군을 크게 무찌르고 「밀라노」시에 입성함으로써 결정적인 「프랑스」의 영웅이됐다. 「나폴레옹」 장군은 「이집트」원정에서 돌아오자 「쿠테타」를일으켜 1800년에 제1?정관이 되고 2년 후엔 자신이 ?신?정관을 선포, 다시 2년 후인 1804년엔 「프랑스」황제의 용상에 앉게되었다. 황제가 된 후에도 「유럽」정복을 계속, 「오스케르리츠」와 「이에나」등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1812년 70만대군을 거느리고 「모스크바」원정을 갔다 패하자 「나폴레옹」군의 기동력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틈에 처들어온 「프로시아-오스크리아」연합군에 「라이프치히」에서 대패하고(1813년) 1814년엔 연합군에 붙잡혀 「엘바」섬으로 귀양을 떠났다. 그러나 이둠해 「루이」 18세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극적으로 「엘바」섬을 탈출, 「파리」에서 백일천하를 이루었으나 「워털루」의 대패로 다시 「셍텔렌」섬에 유배되어 1821년 5월5일 「나폴레옹」은 「유럽」통일의 ?의를 못다한 울분 속에 마지막 눈을 감았다. 1807년 「라이프치히」 대학은 왕좌이름 하나에다 「나폴레옹」이름을 붙였고, 1811년 「비엔나」에선 「나폴레옹」을 군신의 동상으로 모셨다.

<예수와 비기기도>
「나폴레옹」자신도 「셍텔렌」섬에 갇혀있으면서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도 내 아들은 왕이 될 것이다.』라고 호언하여 자신을 「골도다」산상의 「예수」와 비교하기도 했다. 1816년 남하에선 가장 잘 달리는 말과 제일 잘 싸우는 닭에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붙였다. 미군엔 「앨라배마」, 「켄터키」, 「인디애나」, 「미시간」, 「미주리」, 「노드·타코다」, 「오하이오」등 여러 주에 「나폴레옹」이란 도시 이름이 있고 「로마」와 「바르샤바」엔 「나폴레옹」 광장이, 중국엔 「나폴레옹」초상화가 있다.
「파리」에 만도 그가 창건한 개선문, 「마들렌」대성당, 그의 무덤이 있는 「엘발리드」등 큰 건물이 있고 「방돔」광장엔 「오스테르리츠」전투서 노획한 2백50개의 대포를 녹여만든 45미터 높이 원주가 있어 꼭대기에 「나폴레옹」이 서있다. 그러나 아직 「파리」에 「나폴레옹」광장이나 「나폴레옹」가가 없다.
다만 「센」강에서 「룩상부르」공원 뒷길로 빠지는 좁은 길 하나가 「보나파르트」란 이름으로 불릴뿐이다. 그래서 그의 탄생 2백주년을 계기로 「엘발리드」 대광장이 불원「나폴레옹」광장으로 명명된다고 한다.
「프랑스」와 「유럽」의 모든 분야에 골고루 비쳐온 그의 위대한 그림자는 아직도 오랫동안 세계사에 남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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