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휩쓴 시위두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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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거사일을 3월1일로 잡은것은 고종의 인산으로 경향각지와 국내외로부터 많은 군중이 운집하고 또 고종의 독살설로 흥분된 기회를 이용하되 인산일인 3일과 또 기독교를 위해 일요일인 2일을 피하기 위해서다.
거사계획은 시간과 식순까지도 미리 정해졌던 것으로 원산, 의주, 평양, 안주같이 식순대로 거행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서울만은 28일밤 대표29명(4명은 지방에 있어 불참) 이 가회동 손병희집에 모인후 계획을 변경하여 그길로 인사동에 있는 이완용의 구가인 명월광지점(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기어 3월1일 하오 2시쯤 그곳에서 선언식을 갖고 조선총독부경무국에 전화로써 독립선언의 사실과 대표들의 소재를 알리고 체포되어갔고 탑동공원에서는 계획에따라 모여든 학생과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시가를 누볐으며 일군경의 무차별한 총검으로 많은 사살자와 피체자를 내었다.
만세시위는 첫날에 이어 연일 더욱 확대되고 격화되어 전국의 방방곡곡은 말할것도 없고 멀리 해외에까지 번져서 앞으로 두달에걸쳐 고조되었는데 여기에는이념의 차이나 사상의 대립도없고 오직 민족독립의 단일목표위에 거족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시위군중은 일제의 강압정치 10여년에 무기를 소지할수도 없었을뿐아니라 독립의지를 표시 전달함으로써 독립을 달성하려는 것이 목표였기때문에 평화적인 시위를 한것이다.
그런데 이시위를 인도의 「간디」 나 공산계통의 비폭력 저항이론에 적용하려는 논이었다. 그러나 「간디」 의 무저항주의도 19년 3월이후에 나온 것이고 공산계통의 「코민테른」에서 시도된것이고보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평화적시위」를 하였음을 자랑삼는 경향도 없지않으나 우리의 자랑은 시위·저항 그 자체에 있는것이지 방법으로써문제를 삼으려는것은 당시의 여건을 무시한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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