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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반세기|체전 50돌의 해… 어제의 고난과 내일의 기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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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스포츠 한국은 69년의 동이 트자 어언 반세기의 연륜을 새겼다. l920년7월 조선 체육회가 발족, 그해에 첫 체전 (전 조선 야구 대회)을 연후 올해로써 50회 전국체육대회를 맞는다. 국토가 일제 독아에 삼켜진 10년 뒤에 민족 개화의 디딤돌로, 일제 압박에의 항쟁의 분출구로 국토 양단에 의한 고난의 수렁길 속에 자라온 민족 체육은 50년의 나이테를 이어 오늘날 세계 대열 속에 끼이게끔 성장 발전해왔다. 반세기를 맞는 한국 체육이 국력의 총화라고 불려질 정도로 변모한 현대 「스포츠」 세계에 끼이기까지 어떠한 형극과 영애의 길을 걸으며 성장해 왔는지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반성과 새 비약의 내일을 기약해 본다.

<20년대>조선 체육회 발족 첫 사업은 야구전
1895년 신교육령 공포부터 외국인 선교사 등에 의해 구기 중심의 서구식 근대 경기가 운동회 지도 및 전수 등으로 대중화했지만 한국 체육이 집약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는 20년대 초였다.
그것은 당시 체육을 지도 육성할만한 통일된 지도 단체가 없는 데다 19l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정의 간섭과 억압으로 무질서한 경기 활동이 산만하게 행하여지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체육계에도 전기를 마련, l920년7월13일 조선체육회가 역사적 창립을 봄으로써 한국 체육은 첫 출범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종목마다 국제 교환 대회를 개최,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통산 회수의 기점으로 삼게 됐다.
25년에는 최초의 종합 경기장인 경성 운동장 (현 서울운동장)이 완공, 비로소 종합 경기 대회가 개최됐다.
이렇게 발족한 조선체육회는 첫 사업으로 그해에 제1회 전 조선 야구 경기가 활발해졌다. 야구가 미국인과 처음으로 국제 경기를 벌였고 남자가 농구가 일본에 원정, 해외 원정의 효시가 됐다.

<30년대>마라톤 한국 과시. 일장기 말살 사건
1930년대는 한국 선수들이 국제 대회에 출전, 각광을 받은 반면 국내적으로는 일제의 억압 정치에 눌려 조선체육회가 해산되는 등 희비의 쌍곡선을 이뤘다.
이때 김은배는 당당 6위에 입상, 올림픽 대회 한국인 첫 입상자가 됐다. 36년8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의 숙원인 30분 벽을 돌파한 2시간29분19초2란 세계 신기록으로 월계관을 차지, 한국 체육 반세기 사상 유일한 「골드·메달리스트」로 영웅이 됐다. 이때 손기정의 우승은 일장기 말살 사건을 불러 일으켜 마라톤 경기를 총독부에서 종합 대회 이외에는 금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남승룡 선수도 3위에 입상, 「마라톤」 왕국을 불러 일으켰다. 이외에 농구에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축구에 김용식, 복싱에 이규환 등이 참가, 억눌렸던 민족의 울분을 해외에 발산했다.
또 베를린 대회에 앞서 2월에 열린 동계 올림픽에는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 등이 출전, 한국 빙상 선수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참가자가 됐다.
한편 한국인들의 올림픽에서의 화려한 각광과는 달리 일제와 억압은 날로 포악, 급기야 38년7월4일 조선체육회가 해산됐다.

<40년대>런던 오륜 첫 파견 국체도 제자리에
조선체육회 해산에 이어 일제의 구기 말살 정책 등에 눌려왔던 한국체육은 1940년 초의 암흑기를 거쳐 해방이 되자 스포츠의 쇠사슬도 풀렸다.
또 조선체육회가 재건, 각종 대회를 통합할 하기에 이르렀다.
47년4월 대한체육회는 최초로 독립된 한국 이름으로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3명의 선수단을 파견, 서윤복 선수가 2시간25분39초 당당 l위로 골인, 해방된 조국에 감격의 영예를 안겨줬다.
조선체육회는 한국 스포츠 사상 획기적인 거사로 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에 총 67명의 대선수단을 보내, 복싱 한수안, 역도 김성집 등 2개의 동「메달」을 얻어 독립된 대한의 국위를 세계에 과시했다.
이후 국호 대한민국에 따라 단체명과 대회 명칭에 모두 「대한」을 사용키로 하고 조선체육회를 대한체육회로, 조선 올림픽 경기 대회를 전국체육대회로 개칭했다.

<50년대>6·25로 수난기 아주 경기선 금7
조국 해방과 함께 한국 스포츠는 자못 환기를 띠었으나 50년대는 북괴의 남침으로 제2의 수난, 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을 했다.
이런 사태로 51년3월 인도에서 개최된 제l회 「아시아」 경기 대회에 출전조차 못했다.
전화를 딛고 일어선 스포츠 한국은 54년5월 「마닐라」 제2회 「아시아」 대회에서 육상2, 복싱 1, 역도 4등 총 7개의 금「메달」을 획득, 아시아 스포츠 강국의 자리에 파고들었고 58년5월 동경 제3회 아시아 대회에서도 육상 2, 역도 2, 복싱 2, 사이클 5개 등 총 11개의 금「메달」로, 한국 스포츠의 위력을 과시했다.
또한 56년 제16회 멜버른 올림픽 대회에도 57명의 선수단이 참가, 복싱 송순천 은「메달」, 역도 김창희 동「메달」 등 2개의 「메달」을 획득했는데 「복싱」의 송순천은 해방 후 최초의 은「메달리스트」이다.
그러나 선수단 해외 파견을 둘러싼 체육회 임원간의 분쟁은 회장단의 개선 등에 연쇄 반응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나 이런 잡음 속에서도 대한체육회는 54년3월16일 사단 법인체로 등록 규정을 변경,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60년대>두차례 공백기도 눈부신 여자 농구
1960년 이후 한국 스포츠는 4·19의거, 5·16혁명으로 인한 공백기를 치르면서도 허다한 국제대회 참가에 세계 스포츠 열강에 도전하려 안간힘을 기울여왔다.
5·16후 국민체육진흥법의 공포로 스포츠도 도약 단계에 올라서는 듯했으나 이 법의 강제성 결여로 실현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한체육회를 중심으로 각 스포츠 활동이 전개됐다.
64년 제18회 동경 올림픽 대회에도 한국 올림픽 선수단 파견 사상 가장 않은 총2백46명의 메머드 선수단이 파견, 레슬링 장창선, 복싱 정신조 등 체육 사상 두번째로 은「메달」을 얻었고 유도에 김의태가 동「메달」을 얻어 3개의「메달」을 땄다.
특히 동경 유니버시아드에서 여자 농구 「팀」이 세계 정상을 정복했고 세계 군인 복싱 선수권 대회 이창길, 세계 레슬링 선수권 대회 장창선 우승 등 세계 단일 종목 대회에서 한국 스포츠의 획기적인 도약을 보였다.
그러나 금「메달」의 염원이 높았던 68년 「멕시코·올림픽」 대회에서 지용주, 장순길 등 「메달」 등은 체육 반세기에 손기정을 이을 금「메달리스트」가 없었다는 점에 국민들의 실망은 남아 있다. <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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