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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오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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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승희
워싱턴 총국장

깊은 수렁에 빠졌다. 얼른 빠져나와야 하는데 영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피아 구분도 모호해졌다. 딕 체니 전 부통령 같은 보수파가 갑자기 우호세력으로 변모한 반면, 우군이었던 민주당 의원들은 자신을 욕하며 떠나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개인 전화기록과 e메일을 무차별적으로 수집해 왔다는, ‘민간인 사찰’ 폭로 정국 속에 갇힌 버락 오바마 대통령 얘기다.

 NSA는 테러 방지 업무를 담당해 온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이다. 폭로자인 에드워드 스노덴은 NSA 전 직원이다. 전형적인 내부 고발자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폭로 시점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랜초미라지 정상회담 전날(6일)이었다. 중국의 사이버 해킹을 따지겠다는 각오도 물거품이 됐다.

 사면초가의 오바마는 요즘 말수가 적어졌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만 바빠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풀이되는 출입기자들의 질문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지난주 어느 날 정례 브리핑 시간엔 “국가안보가 우선인지,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우선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답변만 스무 번 넘게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오바마를 괴롭히는 건 과거 자신의 발언을 뒤집어야 한다는 점이다.

 6년 전인 2007년 오바마는 연방상원의원이었다. 오바마 의원은 조지 W 부시 정부를 상대로 “반인권적인 행위를 한다고 미국의 안보가 강화되는 건 아니다”며 개인 통화기록 수집행위를 비판했었다. 국가안보가 중요해도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빌미가 돼선 안 된다는 게 의원 시절의 소신이었다.

 하지만 행정부의 수장이 된 지금 오바마의 발언은 달라졌다. 그는 “테러 위협 속에서 미국과 미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다”로 바뀌었다. 이런 그에게 언론들은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과 다른 게 뭐냐며 ‘조지 W 오바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여줬다. 수모도 이런 수모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자신의 논리에 48% 대 44%로 찬성이 더 많다는 여론조사 결과(타임지, 11일 조사)다. 앞으로 위기 정국을 어떻게 돌파할지는 오바마의 몫이다.

 하지만 태평양 건너 다른 나라, 다른 대통령의 얘기 속에 타산지석의 교훈도 있다. 과연 대통령의 소신이나 공약은 절대불변으로 지켜져야 하느냐다.

 후보 시절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 개방을 막겠다”고 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개방 결정이나,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한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을 소신 뒤집기라고 욕할 수 있는 걸까. 오히려 더 큰 국익 앞에서 개인의 소신이나 공약을 버릴 수도 있는 게 ‘좋은 대통령의 조건’이다. 그게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을 위해…대통령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의 의무다. 출범 100일을 넘긴 박근혜정부에서 공무원들이 공약집에 줄을 쳐가며 일한다는 소식은 영 달갑지가 않다.

박승희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