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 대부분 침략 속죄 옳다 생각 아베가 뒤집는다면 국제고립 부를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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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 ‘현대 역사관의 뿌리’는 무라야마 담화다. 전후 50년을 맞아 1995년 8월 15일 발표됐다. 전후 최초로 전쟁을 ‘침략’이라 표현하고 식민지 지배를 참회했다. 총리가 바뀔 때마다 국회와 언론은 새 총리에게 “무라야마 담화를 승계하는가”라는 질문을 일성으로 던진다. 담화 계승은 곧 역사인식의 계승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정권 이후 역대 일본 정권은 예외 없이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해 왔다.

 하지만 이를 은근슬쩍 뒤집으려 하는 게 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다. 담화의 주인공 무라야마 전 총리는 그런 아베 정권에 걱정이 많았다. 길고 흰 눈썹이 인상적인 그와의 인터뷰는 15일 오후 그의 출신교인 메이지(明治)대 도쿄 교유회 사무실에서 한시간가량 JTBC와 공동으로 진행됐다.

주변국 신뢰 깨는 언동 미국서도 비판

-아베 총리는 지난 4월 22일 국회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건 아니다”고 한 뒤 집중포화를 맞곤 “계승한다”고 물러섰다. 하지만 아직까지 담화 인용 시 ‘침략’ ‘식민지 지배’란 단어는 결코 꺼내질 않는다. 아베 총리의 본심이 뭐라고 보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때그때 말을 바꾸니…. ‘그대로 계승하는 건 아니다’고 했다 ‘계승한다’고 해 보고, 또 ‘침략이란 말에는 국제적 규정이 없다’고 말해 놓곤 또 물러서니, 참….”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건 도쿄전범재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 전후 체제를 부정하는 것 아닌가.

 “골치 아프게 꼬이게 된다. 침략을 애매하게 하거나 주변국의 불신을 사는 발언은 안 된다(무라야마는 아베가 침략의 규정을 모호하게 답하자 ‘무력으로 적국에 들어가면 그게 바로 침략이지 그 이외의 다른 표현은 없다’며 정면 비판 했다). 미국 또한 일본이 그런 것 갖고 주변국과 대립하고 고립되는 걸 원치 않는다. (일본은 담화 부정으로) 고립의 길을 택할 것이 아니라 협력과 상호이해의 틀을 보다 확실히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무라야마 담화의 핵심은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국책을 잘못해’ (중략)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국가, 그중에서도 ‘특히 아시아 제국의 국민들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는 부분이다. 담화를 부정하는 세력들은 표현들이 모호하다며 역사적 가치가 없다거나 특정 국가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왜 이런 표현이 됐나.

 “역사학자가 교과서를 만들거나 사료를 정리할 때는 역사적 사실을 명백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담화는 그렇지 않다. 과거를 돌이켜봤을 때 모든 이들이 상상하면 아는 것들이다.”

국익 생각한다면 야스쿠니 참배 안 돼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무라야마 담화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국민은 담화가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민당은 이걸 선거에서 문제 삼아봐야 유리할 게 없다고 보고 쟁점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면 아베는 8월 15일 종전기념일에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할 것으로 보나.

 “국제정세를 볼 때 어떻게 하는 게 일본의 국익이 되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히 가지 않는 게 옳다. 또 그건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약속을 한 것이다. (도쿄재판에서 결정된) A급 전범을 수용하고 그걸 전제로 조약이 체결됐던 것이다.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깨선 안 된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 현상이 강해지고 있는 원인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의 위협과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 때문에 ‘좀 더 일본이 힘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 하지만 전후를 되돌아보며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서 무력을 강화하는 편이 더 좋았을까’라고 묻는다면 일본 국민은 명백하게 ‘노(No)’라고 답할 것이다.”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의 위안부 망언은 어떻게 생각하나.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논평 가치도 없다.”

 -아베 정권이 개헌을 위해 일단 96조 개정(개헌 발의를 위해선 중·참의원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하게 돼 있는 조건을 ‘과반수’로 낮추는 내용)을 하려는데 뜻대로 될까.

 “아베는 당초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한다거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그걸 정면으로 문제 제기하는 게 불리해지니 일단 96조를 바꿔 개헌을 쉽게 하려고 한다. 그런 임시변통적 수단이 통할 리 없다. 국민은 모두 안다.”

위안부 당사자 증언 외 뭐가 더 필요한가

  -아베 내각에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河野) 담화에도 부정적 시각이 많은데.

 “고노 담화를 부정하려는 이들은 ‘집에 들어가 다짜고짜 강제로 끌어 낸 다음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사실의 기록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자백 외엔 없다. 그런 걸 기록에 남기겠는가. 위안소는 군 작전상 필요해서 군이 주도해 만든 것 아닌가. 사실로서, 거기서 몹쓸 짓을 당했다는 당사자의 자백이 있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95년 위안부 피해 여성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 아시아여성기금을 직접 설립했지만 결국 유야무야됐다. 아쉬움이 있나.

 “어떤 형태로든 위안부 희생자들께 속죄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국민으로부터 모금을 하고, 정부도 보조금을 내고, 정부를 대표해 총리가 위안부 희생자들께 사죄 편지를 쓰는 이른바 ‘3점(종) 세트’로 속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 한국 내에서 새로운 문제(헌법재판소의 배상 협상 지시 등)가 나온 만큼 그에 대응하는 대화가 필요하다. 양국 정부 간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양국의 신정권이 출범한 이후 대화마저 단절돼 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한국 국민의 입장과 마음은 잘 안다. 하지만 전후 반성의 토대 위에 평화의 길을 열고자 한 일본 국민의 노력은 좀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현 상황은 일본에도 한국에도 도움이 안 된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돼야 한다.”

도쿄=김현기·서승욱 특파원

"아시아 제국에 손해와 고통 … 통절한 반성·사죄"

◆무라야마 담화 요지=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국책을 그르쳐 전쟁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국가, 그중에서도 특히 아시아 제국의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

 미래에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런 역사의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으로부터 사죄의 기분을 표명한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친다. 우리나라는 깊은 반성에 입각해 독선적인 내셔널리즘을 배척하고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평화 이념과 민주주의를 널리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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