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역사·문화 담긴 이름들 다 사라질 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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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호 14면

『한국 지명 유래집』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은 “지명(地名)이 곧 무형문화재”라고 말한다. 우리 지명엔 역사·지세·풍토·지질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명 변천사

예를 들어보자. 서라벌(경주), 달구벌(대구), 비사벌(창녕) 등에서의 벌(伐)은 원래 삼국시대 신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미추홀(인천), 매홀(수원), 마홀(양주) 등의 홀(忽)은 고구려 영토였다. 소부리(부여), 모랑부리(고창), 고랑부리(청양) 등의 부리(夫里)는 백제 땅이름이었다. 양원, 퇴계원, 사리원, 인덕원 등의 원(院)은 숙소·주막·음식점이 있던 곳이었다. 말죽거리, 마장동, 구파발도 조선시대 교통과 관계가 깊은 지명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삼국과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꽤 많다. 성북구 도선동은 신라말 도선(道詵)대사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주한 미 공군의 사격장이 있던 매향리(梅香里)는 원래 미륵불을 기다리며 향을 묻어뒀다는 뜻에서 매향(埋香)이라고 불렀다. 반재원 훈민정음연구소장은 “외국의 지명엔 한국과 같이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게 드물다”고 말했다.

1990년대부터 옛 지명이나 지명의 유래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가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의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고장 지명의 연혁을 알아보는 사업을 앞다퉈 진행했다. 국립지리원도 2008~2011년 전국적으로 지명 유래를 조사한 뒤 『한국 지명 유래집』을 내놨다.

또 일제강점기 때 고쳐졌거나 사라졌던 지명을 되돌리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지명을 대대적으로 손봤다. 별 뜻 없이 방향에 따라 동남북서(동면·서면·남면·북면)를 붙이거나, 번호(죽일면·죽이면·죽삼면)를 붙이는 경우도 많았다. 인사동(관인방+사동)처럼 두 개 지명을 합치면서 각각에서 한 글자씩만 따내기도 했다. 한국땅이름학회는 서울의 동 이름 중 30% 정도에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집계했다. 여론의 지적에 따라 95년 서울의 인왕산의 한자는 ‘仁旺山’에서 ‘仁王山’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일제는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의 지명에 왕(王)자를 쓸 수 없다며 한자를 제멋대로 고쳤던 것이었다.

지명이 복잡하게 꼬인 것은 광복 이후다. 정부는 일제 때 주소체계를 약간 손질해 그대로 썼다. 일제의 행정구역 단위인 마치(町)를 동(洞), 도리(通)를 로(路), 초메(丁目)를 가(街)로 각각 이름만 바꾼 뒤 ‘법정동’이라는 행정구역으로 지정했다. 법정동은 공식 문서상 주소로 쓰인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주민수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법정동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주민센터를 둔 동·리인 ‘행정동’이라는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다.

도심 공동화가 일어난 서울의 중구·종로구는 여러 개 법정동을 하나의 행정동으로 묶었다. 반면 봉천동·신림동·남현동 등 3개 법정동만을 가진 관악구는 봉천동의 경우 12개 행정동(본동~11동)을, 신림동은 14개 행정동(본동~13동)으로 나눴다. 그러다 2008년 보라매동·난곡동·대학동 등 21개 행정동으로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봉천’이라는 지명이 행정동에서 빠졌다. 예전 대표적인 낙후지역 이미지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관악구청의 지번 주소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1570-1이다. 그러나 ‘봉천동 주민센터’는 없다. 배 회장은 “행정동을 두지 말고 새로 동을 만들고 지번을 정리했어야 했는데 ‘행정 편의주의’ 때문에 지명체계가 복잡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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