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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가람이병기선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시조시인이며 국문학연구의 위대한 스승, 가람선생이 돌아가셨다.
지금 숙홀지간에 유명을 달리하여 이글을 초하니 가슴이 망극하다.
1957년10월9일 한글날 기념식전후 댁으로 돌아가시는 도중 계동어귀에서 뇌일혈로 쓰러지시고, 그래도 불굴하신 의지로 10여년을 투병고초를 겪으시다 이제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 뇌락한 성품에, 오연한 웃음에, 그 섬세한 시품에, 한평생을 시주와 더불어 살으시다 77세를 일기로 전북 향제에서 고적하게 고종하셨다.
이제 선생님을 추모하는 뜻에서 평생의 업적을 추려보고자 한다.
가람 선생은 1891년3월5일 전북익산군려산면원수리에서 변호사 채의 장남으로 태어나시고자1913년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교편을 잡으시며 도서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시는 한편 시조문학의 재흥을 위하여 기수로나서셨다.
1921년 조선어연문회의 조직에 참가, 우리말 연구에 착수하셨고, 다시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으로 활약하셨고, 많은 국학의 논문저서, 시집으로「시조의발생과 가곡과의 구분」(1934년)「송강가사의 연구」(36년)「한중록언해」(38년)「가람시조집」(39년)「인현왕후전」(40년)「역대시조선」(40년) 해방후「국문학전사」「국문학개론」「요로원야화기」「한국서지의연구」등을내셨고, 그동안 옥고를겪으시고 귀농도하다, 해방과 더불어 군정관편수관을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 국문학교수를 하시니, 이제 국문학계에 크게 활약하고 있는 많은 중견들이 그분의 제자이기도하다. 그뒤에도 그분 독특한 방약무인한 명강의로 학생들을 매료시키는 한편 많은 논문을 쓰시고, 6·25후 전북대학교문리대학장으로 계시면서 지방의 문화에 공헌하셨고, 그러나 항상 중앙의 학계에도 지도적 역할을하셔 학술원회원으로 있으면서 젊은이 못지않게 활약하시다 l0년전 중풍으로 와석하시게된것이다. 그러나 학계나 시조계에는 소위「가람정신」이 남아있어 살아계신 지표로서 우러러 보았더니 이제 돌아가셨다하니 가슴이 망극하다.
평생의 아끼던 서적은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셔「가람문고」로서 영원히 살아있으려니와 그풍모는 이제 접합 수 없구나. 가람선생은 시조시인이요, 국문학자요, 또 서지학자요, 국학자요, 일류의 좌담가로서 국학계의 신화로서 영원히 살아계실것이지만, 평소 책을 읽으실때 일피분향삼배하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길 없구나.

<연세대교수>김 동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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