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연설 막판 고심…민감한 '디테일'은 피할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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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호 05면

청와대가 27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질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중앙일보가 지난달 22일 칼럼에서 제기해 화두로 떠오른 ‘박 대통령의 중국어 연설’ 여부를 놓고서다. 청와대 측은 요즘 중국 전문가와 각계 인사들을 접촉하며 의견을 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첫 국빈 방중과 한ㆍ중 정상회담

정부 소식통은 “박 대통령의 중국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라 공개 연설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면서도 “한국 대통령 초유의 ‘중국어 연설’이 어떤 정치적 파장을 낳을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지적 때문에 전문가들의 견해를 다각도로 청취 중”이라고 전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8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영어로 했을 때도 우리 사회 일각에선 한국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영어는 보편적 세계어(lingua franca)라는 점과 한·미 동맹의 특수성,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전임 대통령 5명도 영어로 연설한 점이 감안돼 큰 무리 없이 영어 연설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중국어 연설 여부는 미묘한 파장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한·중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한국 대통령으로서 첫 중국어 연설을 할 필요가 있다’는 찬성론과 ‘아직 국제적 보편성이 없는 중국어로 연설하면 자주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신중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서다. 신중론의 밑바닥엔 박 대통령이 중국어 연설을 할 경우 미국 상·하원 영어 연설로 상징되는 한·미 관계 ‘특수성’의 빛이 바랠 것이란 우려도 깔려 있다.

청와대 측은 그래서 박 대통령이 중국에서 한 차례 공개연설을 하되 한국어나 중국어, 또는 핵심적인 대목만 몇 차례 중국어를 쓰는 방안 등 세 가지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다. 한 정부 소식통은 “외국어 연설이 대통령에 주는 부담을 줄이면서도 중국에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절충안(핵심 대목만 중국어 사용)이 유력하게 논의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의원 때 네 차례 방중…中 국빈급 환대
박 대통령은 야인 시절(35세)인 1987년 대만의 중국문화대학에서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회의원 시절엔 2001년, 2005년, 2006년, 2008년 등 네 차례나 중국을 찾았다. 특히 2005년과 2008년 방중 땐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면담했다.

당시 교육방송(EBS)를 통해 5년간 독학했다는 박 대통령의 중국어 실력은 중국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했다. 중국어로 3분짜리 즉석연설을 했고 ‘예라이샹(夜來香)’ ‘톈미미(甛蜜蜜)’ 같은 대중가요를 좋아한다고 말해 중국인들의 환호를 받은 것이다. 북·중 혈맹시대를 구가한 김일성 주석 역시 중국 측 지도자들과 만날 때 통역 없이 대화를 나눌 만큼 중국어 실력을 자랑했다. 이에 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어 실력은 ‘보통 이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측도 박 대통령이 방중할 때마다 국빈급 숙소인 댜오위타이(釣魚臺)를 내주며 환대했다. 2008년 방중 땐 김정일이 묵었다는 18루(樓) 객실을 배정했다고 한다. 이런 환대 속엔 중국에 소원했던 이명박(MB) 당시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배어 있었다. 차기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큰 박 대통령을 ‘친구’로 만들어 놓겠다는 노림수가 깔린 것이다.

중국의 이런 기조는 박 대통령 취임 후에도 이어졌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박 대통령을 오랜 친구(老朋友)라고 부르며 한·중 수교 20년 만에 첫 취임 축하 통화를 했다. 양제츠(楊潔篪) 외교부장도 박 대통령의 특사로 방중한 김무성 의원을 면담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공감한다”고 밝혔다. 정부 관계자는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한 MB와 달리 대화·압박을 병행하는 박 대통령이 자신들의 대북 전략과 잘 맞을 것으로 중국 측은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27일 베이징에서 열릴 한·중 정상회담에선 일단 최대 현안인 북핵 문제에 대해 무난한 합의가 도출될 것으로 관측된다. “두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의 중요성에 완전한 의견 일치를 봤다”는 식의 발표가 가능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양국 경제 현안인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놓고도 “조속한 타결을 위해 상호 노력한다”는 취지의 합의문 채택이 예상된다. 이를 조합해 두 정상은 향후 20년간 양국 관계 비전을 담은 공동성명을 채택할 방침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놓고선 양국 외교라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미묘한 온도차
박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이어 시진핑 주석에게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반면에 시 주석은 북한을 압박하는 만큼 남북대화에도 무게를 싣는 것을 원한다. 또 한국이 동북아 지역의 이슈를 주도하려는 인상을 주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 대해선 의문을 표시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탈북자 처리 문제도 숨은 쟁점이다. 박 대통령은 라오스 탈북 청소년 강제 북송사건을 거론하며 중국이 탈북자 보호를 위해 노력해 주기를 희망할 걸로 전망된다. 하지만 시 주석은 ‘탈북자는 국제법·국내법과 인도주의에 따라 처리한다’는 중국 측 기존 입장을 강조하는 선에서 그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 측 인사들은 최근 “모처럼 남북대화 물꼬가 트인 시점에 정상회담이 열리는 만큼 공동성명에 민감한 디테일을 담기 어려울 것”이란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이 북한과 미국을 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견 노출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성균관대 이희옥(중국정치) 교수는 “시 주석이 최근 북한의 도발적 행동에 불쾌해하며 압박 기조를 보여왔지만 미국을 위협으로 보는 중국의 대미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북한 체제 유지를 원하는) 중국의 대북관이 근본적으로 변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박 대통령은 중국의 위상과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우리 외교의 근간은 한·미 동맹이란 생각이 뚜렷하다는 게 친박계 인사들의 전언이다. 박 대통령은 의원 시절 면담했던 중국 요인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면서도 북핵 문제에 대해서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2006년 방중 당시 면담했던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부 부부장 겸 외교부 당서기(현재 외교담당 국무위원)에게도 이런 입장을 얘기했다가 논쟁이 벌어져 30분 면담 일정이 70분으로 늘어났다는 일화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27일 정상회담에선 이 같은 두 정상 간의 이견을 최대한 배제하고 ‘의견일치’를 강조할 가능성이 크다”며 “박 대통령의 중국 소프트파워가 곧바로 국익으로 연결될 수 있는 건 아니므로 과도한 기대보다는 실사구시 시각으로 정상회담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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