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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국군「막강」까지의 비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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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일은 한국군이 성년을 맞는 돌잔치 날이다. 99식 총으로 무장됐던 욱군, 3백달러짜리 상륙주정 2척도 제대로 움직일수 없었던 해군, L4연락기뿐이던 공군이었지만 6·25의 큰 시련등을 겪으면서 이제는 유도탄, 초음속「제트」전투기, 구축함등을 보유하며 공산침략을 받은 우방을 돕기위해 해외에 5만병력을 파병하고 있는 세계의 강군으로 성장했다. 성장이 있기까지의 많은 비화를 들추어「국군20년」을 돌이켜본다.

<육군>모체는 군사영어교|미군사고문 이응준씨가 건군작업|출신군 달라 파벌로 골치도
45년 해방이 되자 일본군에 징발되었던 한국인출신들이 점차 귀국했다. 또 만주,「시베리아」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던 광복군 출신들도 뒤를이어 돌아왔다.
일본군 육군 대좌이던 이응준씨가 귀국한 것은 8월22일이었다.
독립과 함께 국방을 맡기 위해 일본군 중국군단주군 간부출신으로 조선임시 군사위원회가 조직됐다.
이들은 우리 일본군출신의 장병을 흡수하여 해방직후의 치안확보를 목적으로 삼았다.
당시 미군정청은「군사영어학교」를 설치했는데 이응준·원용덕씨에게 학생모집을 의뢰했다.
이때 제1기로 입학한 학생중에는 정일권 최영희씨등도 끼어있다. 이와는 별도로 각종 사설군사단체도 난립했었다.
46년에 미군정청은 군사국에 한국인 고문으로 이응준씨를 두고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임시사무소를 설치, 본격적인 건군작업을 하도록 했다.
경비대원은 지원제였는데 당시 이씨는 사상적인 혼란기이니 만큼 경찰서장의 신원조회를 거치라고 했으나 미군정청의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 결과「여·순 반란사건」「제주도사건」등이 생겨났다.
갖은 진통끝에 국방경비대는 46년1월14일에 미군정법령 86호로 탄생, 국군의 모체가 됐다.초대사령관에는 전군사영어학교장 원용덕씨가 임명됐다.
간부는 군사 영어학교에서 수업중인 학생중 영어에 능숙한자로 확보하고 이밖에 채병덕 유재흥 양국쇄 금석원씨등을 특채하여 간부로서 확보했다. 경비대는 도청소재지마다 중대병력의 조직을 4윌까지 모두 마쳤다.
이리하여 경비대는 창설 2년6개월만인 48년7월에는 5개여단 15연대로 성장했다.
정부가 수립되자 48년9월1일 경비대는 대한민국육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의 육군으로 자라기에 이르렀다.
경비대시절의 무기로서는 3·8식 M1등 소총과 약간의 기관총정도 였는데 당시 교관들은 제각기 출신군이 다름으로 훈련방식도 달라 통일성이 없었다.
동란이 날때만 해도 육군의 장비는 한심할 정도였다. 육군은 다른 해·공군과 같이 동란동안에 오늘날과 같이 자랐다.
군정하의 군사영어학교는 46년4월30일 폐교되고 다음날인 5월1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로 개칭, 군사영어학교 입교생80명을 인계받았다.이들 제1기생 중에는 임충식 서종철 김동빈씨등이있다.
이 학교는 정부수립 후에야 육군사관학교로 정식개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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