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8 마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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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음악은 거리에서 태어났다. 모두 떠나가고, 더 이상 희망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슬럼가의 바닥을 기어다니는 흑인들에게서.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욕설과 함께 내뱉으면 그것이 바로 랩이 된다. 그렇게 시작된 랩이 철학과 사상을 얻으면 위대한 시가 된다.

1998년 선댄스 영화제 대상을 받은 '슬램'에서 감옥에 갇힌 흑인 시인은 옆 감방의 래퍼와 대결한다. 욕설 가득한 랩으로 사회를 공격하는 래퍼에게 그는 현실의 고통과 희망을 유려한 상징과 은유로 표현한 시로 화답한다.

그들의 어투는 다르지만 랩과 시의 운율과 정신은 다르지 않다. 흑인의 삶을 담은 랩과 시는 근본적으로 하나다. 영화 '8마일'의 지미(에미넴)와 친구들이 추앙하는 투팩(2PAC)은 최고의 래퍼이자 시인이었다.

'LA 컨피덴셜'의 감독 커티스 핸슨의 신작 '8마일'은 랩 음악, 힙합의 근원을 파고드는 영화다. 그런데 왜 백인 래퍼일까? 지미는 먹이사슬의 바닥에 던져진 존재다. 힙합 문화에서 백인은 이방인이다. 진짜 '깜둥이'인 것이다.

랩 실력을 겨루는 '랩 배틀'에 나간 지미는 주눅이 들어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관중의 99%는 흑인. 그들은 '감히 흰둥이가 랩을 한다고?'라며 쏘아본다.

하지만 지미의 삶은 어떤가. 사회의 낙오자들이나 간다는 제강 공장에서 일하고, 애인과 헤어져 어머니(킴 베이싱어)의 트레일러에 얹혀 산다. 틈만 나면 종이 쪽지에 가사를 적어대지만, 노래할 곳은 없다. 친구들과 함께 랩으로 대화를 나누고 싸울 뿐이다.

"이상은 하늘에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라는 대사처럼 지미는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랩은 피부 색깔이 아니라 계급으로 결정된다.

제목인 '8마일'은 백인과 흑인이 사는 지역을 가르는 경계를 뜻한다. 지미는 그 경계를 뛰어넘으려 하지만 돈도, 인맥도, 아무 것도 없는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8마일'은 백인 랩 가수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에미넴의 과거와 상당 부분 겹친다. 에미넴은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서 자랐고 흑인들에게 수없이 구타당하면서도 랩 음악을 지켜왔다. 에미넴은 흑인들 이상으로 비참한 현실의 늪에서 기어나왔고, 지금도 그 고통과 분노를 잊지 않고 있다.

그러니 지미를 연기할 배우는 단언컨대 에미넴뿐이다. 에미넴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버림받은 자의 슬픔과 고통이 배어있다.

주제곡인 '루즈 유어셀프'에서 에미넴은 스타가 돼서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불신을 토로한다. 그에게 싸우지 않는 래퍼는 거짓말쟁이 떠버리에 불과하다.

에미넴 이전의 랩 음악은 흑인들을 위한 비주류 음악이었다. 격렬한 사회 비판과 욕설, 여성차별적인 언어 등은 랩 음악에 대한 편견을 부추겼다.

하지만 에미넴의 랩은 백인들을 랩 음악의 청중으로 끌어들였고, 마침내 '8마일'을 통해 1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다양한 대중에게 랩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R등급 영화로서는 '한니발'에 이어 역대 2위의 오프닝(첫 주말 성적)기록을 세운 '8마일'은 힙합의 근원을 사실적인 드라마와 함께 '쿨'하게 전달한다. 연인인 알렉스(브리타니 머피)는 뉴욕으로 가기 위해 지미의 친구에게 몸을 판다. 그것을 본 지미는 폭발하고, 오디션의 기회도 날아간다.

하지만 그건 알렉스의 잘못이 아니다. 알렉스는 한 번의 기회를 꽉 잡은 것뿐이다. 모든 기대를 접고 자신만을 믿어야 함을 깨달은 지미는 랩 배틀에 나가 승리를 거두지만 다시 공장으로 향한다. 그것이 랩을 할 수밖에 없는, 빼앗긴 자들의 갈 길이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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