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법무부장관|정부수립때주역과 현역이 엮는 성년한국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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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허-이장관, 벌써 반백이구료. 올해몇이시오…』먼저 와있던 초대 법무이인옹은 이호현법무가 들어서자 이렇게 놀라운 듯 반갑게손을 잡았다.
『쉰넷 입니다만…』이장관은 깍듯이대답하며 두손을 공손히 잡았다.
화제는 옛일부터 풀려나갔다.
『어쩌다보니 그때 검찰총장실이 건국내각의 산파실비슷하게 되었었읍니다』-군정당시 검찰총장으로 초대 법무장관이된 이인옹(73)은 8대및19대장관인 이호법무에게 초대조각얘기를 꺼냈다.
귀국한이승만박사가 장석윤 (치안국장·내무장관역임)씨를 통해 지필을 보내왔더란다. 뜯어 보니 『많은 사람을 접촉중인데 나를 도와줄수없겠느냐, 간절히 부탁한다』는 이박사의 친필이더라고. 세상엔 잘알려져있지않았지만 이박사와는 남모르는친분이 있었단다.
『1주일에 세번씩 아침8시에 만났지. 남의 눈에 띄지않기위해 이화장의 뒷문으로들어갔지요. 검찰총장이 이박사한테드나든다면 말이 많을것아니오. 내가 갈때마다「프란체스카」여사가 내단장과 구두를 감추고 침실에서 이박사와 단둘이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마다 이박사는 「노트」를 내놓고 일일이 「메모」했지요.』
검찰총장실과 이화장을연결하는 비밀전화가 가설되고 서신으로도 연락했으면서 초대조각에 자신의 법무장관임명은 방송을 듣고서야 알았다고한다.
그때 제1차로 임명된장관이 외무 내무 재무 법무의 4개부처뿐이어서 이박사에게 『이번조각은 토막토막을내는 「두부내각」이 아니냐』고 묻기까지했다고.
이인초대법무장관의 재임기간은 10개월.
국적법·검찰청조직법·행형법등 국가기본질서에관계되는 모든 법령을 정부수립후 10개월동안에마련했다고 한다.
『건국초기의 검찰은 만능검찰이되어야했어요. 경제안정을 꾀해야하고 인심안정에서 새헌법에따른 법령제정까지…. 그래도 독립된 내나라일이다하니 고된줄 몰랐습니다.』
이옹은 당시 대검검사로 23개국의 외국헌법을연구, 헌법초안을 정리했던 이호장관을 「검찰의능수」였다고 추키면서 20년을 돌이켜 보았다.
『당시는 매일 국무회의가 열렸고 매일 국장회의를 소집했어요. 법무행정의 과제를 연구하라는 장관의 지시를 받고 「아이디어」짜기에 고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기본법령의 정비를 보았고 대일청구권에의한 배상을받기위해 대일강화조약준비위원회를 만들려다 법무부소관이 아니니 기획처로 이관하라는 이대통령의 제지까지 받지않았습니까?』
이장관은 한일협정의기본정신과 윤곽이 건국초에 이미 싹튼 것이라고 했다.
이인씨는『당시엔 법대로처리를 해서 법무장관이 국회에 불려나간일이 없었지』 라고 하자 이장관은『요새는 법대로처리를하지 않았단말씀 입니까…곤란합니다』라고애교(?)로맞서 두사람은 오랜만에통쾌히 웃었다.
『검찰총장으로있을때 서울시내의 공산당원을 소탕하기 위해 「하지」장군에게지원을요청했더니 미군헌병 24명과 기관총4정을 보내주지않겠어요. 어처구니 없었지만 소탕전을 벌인끝에 박헌영을 제외한 이주하 김삼용등 남로당원 70여명을검거했지요. 이때부터 좌익분자들이 표면활동에서지하로 숨어들게 된것입니다』-당시검찰에대한공산당의 증오가 얼마나컸던지 좌익사건을 많이다룬 부산지검 정수복검사가 퇴근길에 저격을받아 사살되기까지 했다는것.
정부수립전에는 검찰의수사지휘권이 말이 아니었다고한다.
『그당시 경찰이「하지」장군등 군정수뇌들과 밀착되어가지고 검찰의 수사지휘에응해야지요. 당시검찰에서 경찰규탄운동을 공공연하게 벌인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는 검사의수사지휘를 잘안듣는 경찰관은 파면할수있도록검찰청법에 규정까지했었다는데 현재는 체임권으로변질되었다고했다.
이옹이 앞으로 준사법기관인 검찰이 행정부의바람에 흔들리지 말것을당부하자 이호장관은 『그런일이 없읍니다』라고잘라말하고 『검찰의 수사지휘권은 어느때보다 흔들림이없다』 고 힘주어 다짐하는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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