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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이 부른 군축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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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7월 8일부터 전 세계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민간인(군무원)들은 강제 무급휴가를 떠나야 한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자동 예산삭감조치인 시퀘스터(sequester)가 지난 3월 발동됨에 따라 2013회계연도가 끝나는 9월 말까지 국방예산을 370억 달러(약 40조원) 절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 75만 명의 군무원 중 전투지역 근무자나 의료 관련 종사자, 핵추진 함정 유지·보수 인력 등 6만8500명만 제외된다. 이를 통해 절약할 수 있는 액수는 18억 달러밖에 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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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은 이미 무급휴가 외에도 쥐어짤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했다. 페르시아만에 배치하는 항모를 1척 줄였다. 나머지 1척으로만 운용하고 있어 중동 지역 전력에 공백이 생겼다. 공군은 전투비행 훈련시간을 단축했고 해군과 해병도 비용이 많이 드는 훈련은 다수 취소했다. 앞으로 장군 정원을 줄이고 군무원을 5년 내 5~6% 감축하는 계획도 검토 중이다.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은 “이 모든 조치를 다 취해도 여전히 돈이 모자란다”고 말했다.

 민주·공화당 간 별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2014 회계연도에도 국방예산 중 520억 달러가 자동 삭감된다. 2011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21년까지 약 5000억 달러의 국방비를 포함, 모두 1조1000억 달러에 달하는 지출을 줄이는 예산조정법(BCA)에 서명했다.

 미국·유럽 등 세계적인 경제·재정위기에 따른 긴축이 군축을 부르고 있다.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으로 크게 늘어났던 세계 방위비는 지난해 14년 만에 처음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스톡홀름 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는 “2012년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이 1조7530억 달러(약 2000조원)를 기록, 전년보다 0.5%(물가상승 감안) 줄었다”고 밝혔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이라크 등 일부 지역 종전의 영향이 작용한 결과다. 미국은 2011년보다 6%나 줄었다.

 긴축 강도가 미국보다 훨씬 강한 유럽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영국은 전년보다 0.8% 줄인 608억 달러, 프랑스는 0.3% 감소한 589억 달러를 방위비로 쓴 것으로 나타났다. 이탈리아도 5.2%나 삭감했다. 유럽은 뒷마당인 북아프리카에서의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 확대, 장기화하는 시리아 내전 등으로 국제안보 수요가 늘어나고 있지만 증액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형편이다. 내 코가 석 자인 미국이 직접 군사개입을 극도로 꺼리고 있어 유럽의 자체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6일 “유럽 국가들이 지속적으로 국방비를 삭감할 경우 유럽은 글로벌 문제의 행위자가 아니라 방관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 이후 지난해까지 26개 유럽 나토 회원국의 국방비는 7.5%나 줄었다.

 유럽 최대 군비 지출국인 영국은 2010년 국방예산을 8%나 한꺼번에 줄이는 바람에 이듬해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 축출을 위한 리비아 군사개입 때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항모 계획이 한시적으로 보류되고 해상초계기 구매도 중단됐다. 육군 병력은 20% 줄여 워털루전투(1815년) 이래 200년 만에 최저 수준인 8만2000명으로 유지할 방침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임기(2017년)까지 전체 정부지출을 600억 유로 줄이기로 한 프랑스는 최근까지만 해도 국방비 10% 감축을 논의했다. 하지만 거의 단독으로 군사작전을 주도한 말리에서와 같이 해외에서의 작전 대비 필요성이 커지면서 가까스로 현상유지를 택했다. 2014~2019년 사이 3만4000명을 줄이는 대신 정찰기와 수송기·공중급유기는 추가 도입해 작전능력을 향상시킬 방침이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프랑스의 군사비는 냉전 시대 3%에서 지금은 1.5% 수준으로 낮아졌다. 독일은 2015년까지 300억 유로 규모를 유지하며 연차적으로 조금씩 감축해 나가기로 했다. 미국의 동맹국인 호주와 이스라엘도 방위비를 동결하거나 소폭 줄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경제 사정이 좋은 중국만 국방비를 대폭 늘렸다. 중국은 올해도 국방예산을 지난해보다 10.7% 증가한 7406억2200만 위안(약 130조원)으로 책정했다. 금융위기 영향을 받은 2010년을 제외하고는 1989년 이래 24년째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중국은 외부의 견제를 의식, 국방비를 연구·우주개발 예산 등에 숨기고 있어 실제 액수는 공식 발표된 것보다 두 배 이상 될 것으로 군사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중국의 군사비는 2003년과 비교해 10년 사이 약 1.8배 증가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중국의 격차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예상보다 빨리 중국의 국방비 지출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했다. 런던 국제전략연구소(IISS)는 중국의 국방비 증가율을 연 15.6% 적용하고, 미국의 시퀘스터 발동으로 인한 국방예산 감축이 계속 이뤄진다고 가정하면 2023년에는 중국이 미국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했다. 올해 증가율 연 10.7%를 적용한다면 2032년 중국이 세계 1위가 된다.

 미국의 국방비 삭감은 군사강대국으로 급부상하는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둔 아시아 중시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 5만20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일본에서 미군의 군사훈련은 대폭 줄었다.

 미국의 재정적자 폭이 최근 들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것이 변수다. 2009년 GDP의 13%로 최고점에 달했던 적자는 그사이 세수 증가와 자산가격 회복 등에 힘입어 2014년엔 4%, 2015년엔 2.1%로 줄어들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의 급속한 군사력 팽창을 주시하고 있는 미국의 국방비 지출에 다소 숨통이 트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참고로 한국의 올해 국방예산은 34조3453억원으로 지난해보다 4.2% 늘었다. 병사들의 월급 인상이 주요인이다.

한경환 선임기자

◆각국의 국방비 쥐어짜기

[미국]

2013년 국방예산 중 370억 달러 삭감

2021년까지 5000억 달러 삭감하기로

[영국]

2010년 8% 줄인데 이어 삭감 추세 지속

육군 병력 워털루전투 이후 최저 수준

[프랑스]

10% 감축 추진하다 말리 사태로 현상 유지

2019년까지 병력·국방부인력 3만4000명 감원

[중국만 예외]

2013년 10.7% 늘어난 7406억 위안(약 130조원)

1989년 이래 두 자릿수 증가율 지속(2010년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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