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6 몰던 기장 "카레이서가 버스 기사 된 격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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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여행의 기술』, 2004). 하지만 그 짧은 몇 초 속에는 공항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의 긴 하루가 녹아 있다. 여객기 기장에서 여권 검사 요원, 계류장 관제사, 터미널 청소용역까지 닷새간 인천공항 에어사이드에서 만난 사람들을 소개한다.

15일 오후 5시 중국남방항공 여객기가 인천공항 104번 주기장에 도착하자 ‘마샬러(marshaller)’ 김성주(52)씨가 유도판으로 정지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마샬러는 공항에서 항공기 유도를 담당하는 직원이다. [강정현 기자]

터미널 에어사이드는 ‘진짜 공항’이 시작되는 공간이다. 랜드사이드는 환영·환송객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만, 에어사이드는 출국 수속을 마친 승객만 들어갈 수 있다. 출입증을 가진 상주 직원들만 예외다. 이들에게 에어사이드는 일상을 벗어난 곳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가는 곳이다.

기장, 120개 항목 점검해야 조종석 앉아

15일 오전 9시 승객들이 탑승하기에 앞서 아시아나 항공 박종록 기장이 비행기 안에서 객실 승무원들에게 비행 계획, 기상 정보 등을 브리핑 하고 있다. [김한별·강정현 기자]

 “비행 예정시간은 3시간10분, 이륙 1시간30분 뒤부터 기체가 흔들리겠습니다.”

 13일 오전 9시10분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14번 주기장의 비행기 안. 50분 뒤 중국 시안(西安)으로 날아갈 에어버스사의 A321-200 여객기다. 아시아나항공 박종록(48) 기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기장은 비행 전 두 번 브리핑을 한다. 먼저 부기장 등 운항 승무원에게 비행 계획을 알린다. 평소엔 기장 1명, 부기장 1명이 탑승하지만 이날은 교육 훈련 중인 부기장 1명이 추가로 합류했다.

 박 기장은 이어 주요 내용을 객실 승무원들에게 전달했다. 다음엔 직접 기체 점검이다. 점검 항목이 크게 21개, 세부 항목은 120개나 된다. 이런 과정을 다 마친 뒤에야 기장은 조종석에 앉을 수 있다. 각종 계기판, 조종장치가 꽉 들어찬 조종석 한쪽 벽에는 신용카드 한 장이 매달려 있다. 박 기장은 “예정에 없던 공항으로 회항했을 때 비행기 기름을 넣는 주유 카드”라고 말했다.

 그는 공군 출신이다. 2001년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최고속도가 마하 2(시속 2448㎞) 이상인 F-16 전투기를 몰았다. 이날 박 기장이 조종한 A321-200 기종은 171명의 정원에 시속 841㎞의 경제속도(연료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속도)로 중국과 동남아 등을 오가는 중형 여객기다. “카레이싱 하다가 버스 기사가 된 격이죠.” 최정규(41) 부기장이 이렇게 농담을 던지자 박 기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15일 오후 3시 대한항공 SUS요원 성고은씨가 확대경으로 한 미국인 승객의 여권을 살펴보고 있다. SUS요원은 위조여권 사용자를 찾는 일을 한다. [김한별·강정현 기자]

  15일 오후 3시15분 터미널 10번 게이트.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가는 대한항공 여객기의 탑승이 시작됐다. 자외선 검사기와 확대경을 손에 든 성고은(37)씨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성씨는 이 회사 SUS팀 요원이다. SUS는 Suspicious(의심스러운, 수상쩍은)의 앞글자로, 위조여권·비자를 사용하는 승객을 가리킨다. 인천공항에서 환승해 제3국으로 가는 여행객 가운데 의심스러운 사람을 가려내는 게 SUS팀 일이다. 성씨는 “가짜 여권을 구별하는 원리는 위폐감식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자외선 검사기를 비자에 쬐면 맨눈에 보이지 않는 형광무늬가 나타난다. 여권이나 비자의 무늬 속에도 특수 표시가 숨겨져 있다. SUS팀은 고배율 확대경으로 이를 확인한다.

 성씨는 지난해 10월 이 팀에 합류하자마자 위조여권 사용자 2명을 잡았다. 일본 여권을 사용하던 중국인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 행세를 하던 나이지리아인이었다. 두 사람 다 캐나다행 비행기를 타려다 성씨에게 적발됐다.

가장 마지막 탑승객은 강제 송환자

  승객 가운데는 타의로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16일 오후 5시10분 탑승동 115번 게이트 옆. 느웽(42)은 베트남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2003년 베트남을 떠나 한국에 온 뒤 10년을 살았다. 경기도 여주의 버섯농장 등에서 일하다 며칠 전 불법체류 단속에 적발됐다. 이날 아침 공항으로 이송됐고 탑승동 2층 강제퇴거집행대기실에 머물다 법무부 직원 뒤를 따라 게이트에 왔다. 느웽은 유창한 한국어로 “(불법체류 사실이 들통날까봐) 지난 10년간 한 번도 베트남에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향을 떠날 때 꼬마였던 자식 남매는 그새 21살, 19살이 됐다. 아내는 그가 한국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땅을 샀다. 강제출국 대상이 됐지만 느웽은 “한국에 와서 돈 많이 벌었다. 고맙다”고 말했다. “5년 뒤에 다시 와요. 그 안에 다른 사람 여권으로 몰래 들어오다 적발되면 다시는 한국 못 와요”라는 법무부 직원의 말에 “잘 압니다”라고 대꾸했다. 강제송환자는 맨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탄다. “안녕히 계세요.” 느웽은 탑승교를 건너가며 또 한번 꾸벅 인사를 했다. 이날 하루 인천공항에선 21개 항공편으로 54명이 강제 송환됐다.

  “아시아나745, 콘택트 인천타워, 118.8” “코리안에어123, 콘택트 그라운드, 121.75”

15일 오후 9시 인천공항 계류장관제탑에서 배동환 관제사가 여객터미널과 탑승동을 들고나는 비행기의 이동을 관제하고 있다. 이 관제탑은 12층 높이다. [김한별·강정현 기자]

 15일 오후 9시30분. 인천공항계류장관제탑 TP(여객터미널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앉은 배동환(36) 관제사가 헤드셋 마이크로 속사포처럼 교신을 쏟아냈다. 앞에 놓인 지상감시레이더(ASDE) 속에서 색색의 점이 분주히 오갔다. 초록색은 출발, 파란색은 도착, 흰색은 관제사가 아직 콜사인(항공기 호출명)을 부여하지 않은 항공기를 나타낸다.

 관제탑은 공항 에어사이드의 핵심시설이다. 푸시백(push-back·주기장에서 토잉카로 비행기를 밀어 후진시키는 것)부터 이륙까지 비행기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한다. 인천공항에는 이런 관제탑이 둘 있다. 공항공사에서 관리하는 계류장관제탑(12층, 65m)과 서울지방항공청에서 관리하는 인천관제탑(22층, 104.3m)이다. 각각 ‘램프’와 ‘그라운드’ ‘인천타워’라는 호출명으로 불린다.

 관제는 3단계로 나눠 진행된다. 주기장에서 유도로 입구까지는 램프, 유도로에서 활주로까지는 그라운드가 관제를 맡는다. 마지막으로 인천타워의 허가가 떨어지면 비행기는 활주로를 달려 비행을 시작한다. 배동환 관제사의 암호 같은 교신은 제3 활주로 방향으로 이동한 국적기 2대에 “지금부터는 인천관제탑과 교신하라”라고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이날 밤 계류장관제탑을 지킨 관제사는 총 4명. 2명 1개 조로 교대로 근무와 휴식을 했다. 장시간 근무로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휴식을 취하던 김여진(35·여) 관제사는 “여행객들에게 공항은 집을 떠나 찾아오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겐 또 다른 집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현대판 등대지기 같다”고 하자 “우리끼리는 ‘주차 요원’이라고 부른다”며 웃었다. 뒤편 창문 밖으로 계류장 바닥에 촘촘히 박힌 초록과 파란색 불빛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비행기 기장에게 유도로와 주변 녹지대 위치를 알려주는 관제등이다. 김 관제사는 “관제탑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이 무척 아름답다”며 “관제탑이 아니라 전망대에서 근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공항일 하지만 한 번도 해외 못 가봤어요”

17일 오전 1시 터미널 3층 43번 게이트 앞에 놓인 나무바닥 청소기. 이때부터 오전 2시30분까지가 청소 직원들이 쉬는 시간이다. [김한별·강정현 기자]

  17일 오전 1시 터미널 서쪽 43번 게이트 앞에서 혼자 앉아 빵을 먹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옆에는 청소기계가 있었다. 그는 인천공항 협력업체 직원이었다. 나이는 쉰아홉, 이름은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오전 1시부터 2시30분까지는 휴식시간이라 간식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4년째 매일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터미널 랜드·에어사이드를 오가며 기계로 나무 바닥을 닦고 있다. 담당구역은 따로 없다. 야간조 18명이 길이 1㎞가 넘는 터미널 동서를 오가며 일을 한다. 그는 “이른 아침 사람들이 상쾌한 기분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게 하는 게 내 일”이라고 말했다. 매일 외국으로 떠나는 수많은 여행객을 지켜보지만 정작 자신은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인천공항은 그렇게 새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천=김한별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에어사이드(Air Side)=공항에서 관제탑·활주로·탑승게이트 등 비행기 이착륙·비행과 직접 관계된 지역을 가리킨다. 에어사이드로 가기 전 거치는 여객·상업시설 등은 랜드사이드(Land Side)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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