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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유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때「공화국의 임종」이란 말조차 어색하지않았던「프랑스」의 위기가 잠시나마 숨을 돌림에 따라 그동안 응급결에 밀려온「어째서」란 물음들이 이제 밀물을 이루고있다. 고역을치러온「프랑스」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초「파리」의 5월을 불질렀던 학생들의 반항하나만을 놓고서도 이런, 또는 유사한 유의 통속적이거나 정치적 편의에 따른 설명만으로는 만족한것이 못된다.

<런던=박중희특파원>
기실「파리」외의 수도들에서도「프랑스」사태가 그토록 신경을 자극해온 까닭은 바로「파리」학생 반란이 그 성격에서건 그에 함축된의미에서건「프랑스」만의것이 아니라는데 있었다는것은 말할나위도없다.
성격운운해도 그또한 있을수있는 설명들이란 단순한 대학행정의 반발로부터 크게는 정치적요구에 이르기까지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중의 하나, 6월7일 다름아닌「드골」자신이 기자회견에서 내렸던 설명-『현대의 물질주의적이며 기계화한 사회가 강요해온 자신의 비인간화와 소외화에의 반항』이란 것이 불씨노릇을 했다는 설명은 기특하게도 과녁을 찌른것이라고 할만하다.
사실 인간의「소외」나「고독」이란것은 그저 사회학적인 정구어이기보다는 지금「유럽」어디에서나 공업화한 사회사람들이 생활의 여러층에 걸쳐 일상으로 경험하는 하나의 현실적 조건으로 돼왔다.
정치적이건 경제적이건기술화하고 전문화한 방대한 조직앞에 개인이란 하잘것없이 무력하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무력감이 모두에꺾임을 당한 느낌을 부어놓고 그것의 누적이 가다간어떤 불만의 촉발로 도화를 당할땐 굉장한 힘으로 터질수도있고 「프랑스」의경우를 그런 예의하나로 든대도 큰 잘못은 아닐것이다.
『「프랑스」는 5천만의시민이 살고있는 나라이기보다는 5천만의 외톨이개인들이 사는 나라』라는비유는 시민의식의 상실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가리키는데서도 쓸수있는 말이다.
그게「프랑스」에만 적격인것도 아니다. 5월이래 이른바 「요여의정치」라는 문제가「유럽」의 광범한 지역들에서 제기, 논란되어온 까닭도 그런 상실이 시사하는 정치적 의미가 「프랑스」의 폭풍적 사태들에 그불길한 편모를 드러냈기때문이었다고 볼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떻든 오늘의동요가 적어도 지금까지의정치, 정권 또는 관례적인관념에 어떤 새로운 평가와 나아가선 수정까지를 다짐하고 있다는것은 확실하다.
우선『배불리 먹여주면표도얻고 안정도 얻는다』는 흔히 써온 가설은 적어도 오늘날 서구적문맥속에서는 그 타당의 바탕을 일부일망정 잃어가고 있대도 아주 어김없진않다.
「드골」치하 10년이 「프랑스」사람들에게 국민적긍지나 전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줬다는 역설도 보기에 따라서는 그리 놀랄만한 역설일것도없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말해온 민주중운란것에의 이해도 그저 산술적합리이상의 부단한 재평가와 수정으로 새로워져야한다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파리」사태를 계기로 민주전통을 자랑해온 영국에서까지 제법 심각히 상기돼왔다는것도 전혀 이상하다할게없다.
『그렇다면 어쩌자는거냐』는 우선은「프랑스」에서는「드골」의 숙제이다.
『공산주의의 거부는 물론 자본주의도 뜯어고쳐 광범한 대중적 참여와 정의를 보장하는 정치』운운한「드골」회견담의 약간의 모호속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숙제를 짊어진「드골」이나 그밖의 지도층의 고민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소위「시적니힐리즘」이란 그야말로「시적」인 표현만이 그럴듯한 여운을 남기고있듯「프랑스」나 그밖의 나라들의 학생들자신의 욕구들이 미처 어떤 논리건 체계에의 정혹의 자리를 잃은 미정리의 상태에 머물러있다는 바로 그사실속에서 우리는 오늘날「유럽」의 불안한 한편 모를 보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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