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출구전략, 버냉키 아닌 오바마 입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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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내 입이 아니라 경제지표를 보라”는 얘기다. 22일(현지시간) 상원에 출석해서도 같은 말을 했다. 그는 “경제 데이터에 따라 자산 매입(양적 완화)을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운을 뗀 버냉키는 “(경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전망이 나빠지면 자산 매입을 늘릴 수 있다”며 “경제 상황이 앞으로 두서너 차례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동안 꾸준히 좋아지는 게 보이면 매입 규모를 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중앙은행가 특유의 알쏭달쏭한 표현이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은 긴장했다. 이날 뉴욕과 아시아 주가가 내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Fed가 3차 양적 완화(QE)를 어떻게 축소할지 분명히 해서”라고 전했다.

 현재 Fed는 매월 850억 달러(약 95조2000억원)를 들여 미 국채와 모기지(주택대출) 담보부증권을 사들이고 있다. 세 차례 QE 때문에 Fed 자산은 8000억 달러 수준에서 3조3500억 달러로 불어나 있다. 중앙은행 역사나 정책 원칙 등에 비춰 비정상적인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전 Fed 간부인 로베르토 퍼릴은 이날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그렇다고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할 긴급 상황은 아니다”며 “올 9월 FOMC 회의(17~18일)까진 경제지표를 예의 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경제지표일까. 바로 실업률이다. 이날 미 상원에서 버냉키는 “일자리가 꾸준히 늘어나는 것을 본 뒤에 (QE를) 조절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현재 미국 실업률(4월치)은 7.5%다. 버냉키의 눈에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Fed는 실업률이 6.5%에 이를 때까지 머니 프린팅을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1%포인트만 낮추면 된다. 하지만 요즘 일자리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실업률을 1%포인트 낮추는 데 거의 1년 정도 걸렸다. 시장은 실업률이 올해 안에 빠르게 떨어지며 목표치에 접근하면 QE가 축소되는 출구전략이 시작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선택은 FOMC 위원들의 몫이다.

 그런데 현재 FOMC는 QE 지지자들(비둘기파)이 장악하고 있다. 위원 12명 중 매파(인플레이션 파이터)는 에스터 조지 리치먼드준비은행 총재 한 명뿐이다. 다른 매파들은 출구전략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의결권이 없다.

 로이터통신은 “비둘기파들은 위기 대응엔 빠르지만 경기회복을 확신하는 데는 상당히 느리다”고 했다. 어지간해서는 올해 안에 출구전략이 시작되기 어려워 보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출구전략은 버냉키의 손을 떠난다. 그의 의장 임기는 내년 1월 말까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늦어도 올해 안에 새 의장을 지명해야 한다. 지명자가 미 상원 인준 청문회를 거쳐야 해서다. 인선작업은 올여름 직후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나 그의 경제 참모들이 차기 의장 인선 기준 등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게 신호탄이다. 구체적인 후보가 거명될 수도 있다.

 미 투자전문 스마트머니는 “앞으로 시장은 버냉키보다 오바마의 입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며 “그의 말 속에서 출구전략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 통화정책이 사실상 오바마 수중에 들어가는 셈이다.

 이미 월가는 차기 의장을 예측하는 게임에 들어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재닛 옐런 Fed 이사, 래리 서머스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티머시 가이트너 전 재무장관 등이 유력 후보로 꼽힌다”고 최근 보도했다.

 옐런 이사는 Fed 내 강경 비둘기파다. 그는 “통화정책이 고용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되풀이해 말했다. 서머스 전 위원장도 옐런보다는 덜하지만 비둘기파로 꼽힌다. 그는 2011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실물경제가 정상화될 때까지 비정통 정책(양적 완화 등)을 오랜 기간 유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이트너는 오바마에 의해 40대에 재무장관에 올랐다. 오바마의 속마음을 잘 헤아려 따를 사람인 셈이다.

 스마트머니는 “버냉키에게 올 하반기는 레임덕(권력누수)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월가는 앞으로 미국 통화정책이 정치적 색채를 한층 강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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