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좡위안방 전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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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중국 베이징(北京) 차오양취(朝陽區)에 사는 류창(劉强.43.여.회사원)은 매주 일요일 오후 7시30분 베이징방송(BTV)에서 방영하는 고교생 퀴즈 프로인 'SK좡위안방(狀元榜)'의 단골 시청자다.

4년 전 이혼한 이후 중학교 3학년인 아들에게 더 엄격해졌다는 그녀는 아들과 함께 3년째 거의 매주 이 프로를 보면서 'SK'가 어떤 기업인지 궁금해 하고 있다.

이 프로 앞뒤에 붙는 30초짜리 청소년 대상 공익광고의 끝 자막에도 'SK集團(집단)'이라는 단어만 나오기 때문이다.

류창은 "하나뿐인 아들의 입시 공부 때문에 TV를 못보게 하지만 이 프로만큼은 청소년에게 유익한 것이어서 같이 시청한다"면서 "특집방송 시상식에 한국 기업인이 나온 적이 있어 SK가 한국 기업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SK그룹이 2000년 1월부터 4년째 중국에서 이 프로를 후원하면서도 제품.사업 내용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브랜드만 알리는 이른바 '그림자 마케팅'을 펴고 있다.

그룹의 중국 진출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한국인 뺨치는 중국인의 높은 교육열을 파고들어 그들의 마음에 브랜드 이미지를 심고 있는 것이다.

SK에 따르면 2001년 11월 중국갤럽이 베이징 중.고생 1천9백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94%가 SK좡위안방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 가운데 87%가 월 1회 이상 이 프로를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만 쌓는다=SK는 1999년 중국을 '21세기 핵심 전략지역'으로 선언하고 본격 진출 전략을 짜면서 이 프로를 계획했다. 이 프로는 SK가 한국에서 73년부터 30년째 후원하고 있는 장학퀴즈 프로그램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SK그룹 이노종 전무는 "고유의 기업문화를 현지 시장에 접목한다는 차원에서 10년 앞을 내다보고 장학퀴즈 프로를 만들었다"며 "당시 사회주의 체제의 베이징방송 관계자들에게 기업의 장학사업에 대해 이해시키는 게 어려웠다"고 말했다.

SK는 이 프로의 제작비와 공익광고를 후원하는 것 외에도 'SK좡위안배 고교생 영어경시대회'를 열고, 베이징 최대 서점 내에 'SK좡위안방 PC방'을 설치해 무료 컴퓨터 교실을 여는 등 '좡위안방 가지뻗기'를 하고 있다. 2001년 영어경시대회에는 베이징 내 고교생 18만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만명이 예선에 참여했다.

SK차이나의 위유(于游)경리는 "2001년 말 SK 중국법인의 첫 중국인 공채에서 무려 1백50대1의 경쟁률을 보인 데도 좡위안방 효과가 작용했다"고 말했다.

한편 SK차이나.베이징방송 등의 관계자들은 이 프로 앞뒤에 SK의 기업광고나 앞으로 내놓을 휴대전화 단말기 광고 등을 붙이자고 제안하고 있다. 중국 현지의 SK 광고대행사인 신홍광고 이춘일 사장은 "지난 3년 동안 돈만 쓴 것 같아 조바심이 나서 제품을 노출시키자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러나 이노종 전무는 "지금 급한 마음에 제품광고를 붙이면 그간 쌓은 신뢰성이 훼손될 수 있다"며 "브랜드 신뢰도만 쌓이면 본격적인 사업에 나서면서 제품 광고를 해도 늦지 않는다"고 말했다.

◇친 SK 인재를 키운다=지난달 26일 오전 11시 베이징 시내 동방문화호텔 2층 세미나실.창 밖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국내 EBS 장학퀴즈 월장원 수상자 9명과 SK좡위안방 수상자 12명이 '한.중 무역'을 주제로 뜨거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 학생이 "한국과 중국이 동북아 경제협력지구를 만들어 미국.유럽에 대응해야 한다"고 하자 중국 학생은"가장 큰 수입시장이자 투자국가인 일본을 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퀴즈왕들의 토론답게 2시간 동안 다양한 시각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이 세미나는 SK그룹이 한국.중국의 장학퀴즈 수상자들에게 양국을 이해하는 기회를 주기 위해 양국에서 각각 5박6일 일정으로 하는 제3회'한중 SK 청소년 캠프'의 행사 가운데 하나다.

SK관계자는 "중국에서 이제까지 주장원 이상으로 선발된 장학생이 3백명을 넘는다"며 "미래의 인재를 키우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외국어대 김유경(신문방송학)교수는 "좡위안방은 해외마케팅 활동을 위한 전략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좋은 사례"라며 "장기적 안목에서 중국 내에 SK그룹에 우호적인 인재를 기르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글 이영렬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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