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존스 홉킨스 병원의 휠체어 탄 의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 로버트 리(사진위)가 다리를 절단한 환자의 환부를 살펴보고 있다(사진가운데). 미세 근육을 쓰지 못하는 그는 특수 보조 기구의 도움을 받아 한 손가락으로 차트를 쓴다(사진아래). [볼티모어 AP=연합]

여덟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 뉴욕에 정착한 로버트 리(38.한국이름 이승복)는 서투른 영어 발음 때문에 또래의 놀림감이 됐다. 그래서 체조를 탈출구로 삼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면 아무도 흉을 안보겠지-.'

10년이 지나도록 그의 꿈은 한결같았다. 그러나 운명의 시간이 찾아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한국대표 체조선수로 출전하기 위해 맹훈련하던 어느 날 공중회전을 하다 추락한 것이다. 경추를 다치면서 사지가 마비됐다.

1년간 재활치료를 받았다. '공중 3회전'을 목표로 삼던 그가 겨우 손가락 관절 움직이는 걸 지상과제로 삼아야 했다. 뉴욕대 러스크 인스티튜트에서의 재활치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큰 근육은 그럭저럭 쓸 수 있었다. 휠체어를 이용하면 밖으로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그는 체조선수의 꿈을 접고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어떤 의사가 될지 청사진도 그렸다.

"의사가 되겠다고 하자 사람들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그 손으로 어떻게 수술칼을 잡을 것인가' '만일 응급 상황이 벌어져 병동으로 급히 달려갈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말로 겁도 주고요. 제 자신도 그런 말이 맞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컬럼비아대에서 공중보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다트머스 의대에 진학했다. 사지마비 장애인으로선 첫 입학생이었다. 그는 현재 미국의 유수한 병원인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재활의학 수석 전공의로 일하고 있다. 미국 내 단 두명 뿐인 사지마비 장애인 의사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장애가 반드시 한계 만은 아닌 듯 하다고 말한다. 치료 대상 환자들과의 '특별한 교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동료 의사는 워싱턴에 있는 군 병원에 갔을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이라크에서 부상해 휠체어를 타는 군인들이 그가 마치 오랜 벗이기라도 한 듯 스스럼없이 다가가더군요."

"스포츠 심리 용어 중 '고생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No pain, no gain)'는 말이 있어요. 저에게도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의 금메달 꿈은 종목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인지 모른다.

미국의 AP 통신은 31일 그의 사연을 '휠체어를 탄 의사가 환자들을 자신에게도 익숙한 길로 이끌고 있다'란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했다.

고정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