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사나이의 유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섬멸하라』던 유언. 고 이익수춘장이 남기고 간 이 소리를 전해듣고 나는 폐부를 찌르는 아픔을 이기지 못했다. 허겁지겁 그의 집(서울 성북구 미아동632의17)으로 달려갔다. (24일 밤7시).너무도 조촐한 빈소가 나를 맞았다. 유족들의 오열은 그칠 줄을 몰랐다. 하도 어이가 없어 멍청히 앉아 있다가 고인이 두고 간 사진첩을 뒤져봤다. 『의를 위하여 죽는 병졸이 되어도 사를 위하여 사는 영웅이 되지 말라. 뒷골목 시궁창에 내버려지는 송장이 되어도 묵묵히…희망과 포부를 안고서…전진을 씻고….』생전에 생활신조로 삼던 그의 의지가 역력했다. 북괴가 남파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진두 지휘타가 숨지기 직전, 그는 동기(예·현2기)인 나를 찾아 이런 말을 했다. 『여보게, 전방 연대장이란 정말 어렵네. 일하다보니 가족들에게도 소홀해지고….』
이것이 의로운 사나이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는 과묵하기로도 이름 있는 친구.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서울운동장에 같이 일보러갔다 나와보니 운전병이 간 곳 없다. 무려1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운전병이 나타났다. 대낮부터 병기(자동차)를 버려둔 채 한잔한 것이다. 그러나 이대령은 말 한마디 않는 모습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가 부하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로구나 싶어 감탄했다.
이같이 부하들에게는 인자, 과묵하지만 전투에는 맹호다. 6·25동란 중에는 숱한 사선을 넘었으며 특히 한강방어작전에서 떨친 용맹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가 받은 미은성훈장이나 화랑무공훈장이 이것을 말해준다.
그는 또 휴전 후에도 대대장, 부 연대장등을 거쳐 15연대장(전사당시)에 이르기까지 청렴
일변도, 불의나 부정하고는 타협할 줄 모르는 무쇠사나이었다.
이제 유명을 달리하고 보니 숭고했던 그의 정신을 본받기에 앞서 부끄럼이 앞선다.
그러나 고 이준장의 고귀한 희생이 우리군의 정신무장에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정녕코
믿고싶다.
이번에 둘째아들 혁병(중앙중졸)군이 경기고교에 거뜬히 합격했다는 소식은 들었소?
『미력하나마 내일의 국토방위나 가족걱정은 저희들에게 맡기세요.』이 한마디로 영령의 넋을 위로하기엔 너무도 부족한 줄 알지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