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이 떠들썩해진 날… 소풍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1979년 가천국민학교 가을 소풍 때. 이상룡 선생님(왼쪽에서 둘째)이 학생들 앞에 서 있고 뒤편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들의 모습도 보인다.

당시 시골 국민학교 소풍과 운동회는 온 마을의 잔치였다. 소풍 때 학생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용돈을 받을 수 있는 1년 중 며칠 안 되는 날이기도 했다. 흰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들도 따라나섰다. 소풍 장소까지 과자 장수들이 따라왔다.

 학생들은 용돈으로 군것질을 실컷 할 수 있었다. 산골이라 김이 귀해 김밥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간식은 집에서 만든 한과와 옥수수빵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것은 계란이었다. 계란 프라이는 부잣집 반찬의 상징이었다. 계란은 물물교환도 할 수 있었다. 닭이 있는 집 아이들은 계란을 가져와 군것질거리와 바꿔 먹었다. 학생들의 편지에 나타난 용돈 규모는 100∼200원이 가장 많았다. 당시 ‘뽀빠이’ 과자 한 봉지 가격이 30원쯤 했으니 과자 몇 봉지를 사 먹을 수 있는 게 소풍의 큰 매력이었다.

 과자를 먹느라 부모님이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을 먹지 않는 대목에선 군것질에 굶주린 시골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소풍 날에는 용돈을 받은 것으로 과자를 사 먹고 점심은 다 먹지도 못하고 집에 가지고 옵니다’.(김연희)

 소풍 장소는 마을 입구 하천 둔치나 산자락 무덤 근처였다. 수백 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은 뒤 보물찾기, 닭싸움, 하천의 돌 뒤집어 물고기 잡기 등을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놀이엔 부모들도 함께 참여했다.

 ‘소풍 날에는 용돈을 받은 것으로 과자를 사 먹고 점심을 먹고 나서 전교생이 모여 보물찾기를 해가지고 준(주운) 아이도 있었지만 저는 아직까지 보물을 주워서 노래를 부른 적도 없읍니다’.(김연희) ‘소풍을 갔을 때 먼 곳에 갈 때 언니들과 손을 잡고 간 일이 있어요. 집으로 돌아올 때는 휴지를 다 줍고 돌아왔어요. 운동회를 할 때 달리기를 하면 1등을 해서 상장을 받은 일이 있고…’. (박춘숙)

 개구쟁이들은 선생님 눈을 피해 술을 마시기도 했다. 과자 장수들이 소주를 숨겨와 학생들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선생님께 들켜서 혼이 난 모습도 보인다. ‘아이들이 술을 먹어라 해서 않(안) 먹을라 하다가 먹었더니 낮(낯)이 발각기(빨갛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술 먹은 사람 나오라 했을 때 어철주을(어쩔 줄) 몰랐습니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잘못했구나 생각되었습니다. 선생님 이제는 어떠한 일이 이떠라도(있더라도) 술이라고는 건바(근처)에도 가지 않겠습니다’.(백주현)

 편지의 주인공 백씨는 “호기심에 소주를 사 무덤 뒤에 숨어서 한 모금씩 마셨던 기억이 난다”며 “ 선생님도 부모님들이 계셔서인지 크게 나무라지는 않으셨다”고 말했다.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없었던 시골에서 소풍을 통해 세대 간에 소통하며 여유를 찾곤 했던 당시의 모습을 편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합천=김상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