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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우리의 미래상을 탐구하는 67년의 「캠페인」|무대예술-대표집필 여석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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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연극이 현재 어디까지 와 있으며 앞으로의 전망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평가 및 판단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합의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어쩌면 오늘의 한국연극이 처해있는 혼미된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만큼 한국연극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심각하다. 연극부진이란말을 우리는 걸핏하면 쓰는 버릇이 있지만 그 부진의 양상에 대한 진단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데 내일에의 전망이 흐린 일인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몇가지 공통되는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고 그 지적되는 점은 언뜻보기에도 누구나 수긍이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에 그 몇가지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전문화막는 요인|「아마추어」적 만족 벗어나>
연극부진의 가장 큰 원인으로서 한국 연극이 전문화. 직업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드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약간 낡은 표현을 쓰자면 흥행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연극으로 돈을 벌거나 먹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재래의 신파극적 상업연극의 부재로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만약 한국연극의 활기를 그러한 형태에서 찾으려한다면 그것은 이미 시대착오이고, 사실이지 그런 의미의 흥행은 영화나 「텔리비젼」이 빼앗아가 버렸다. 지금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돈벌이식 흥행형태로서의 연극은 이미 믿을만하거나 매력있는 존재가 됮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적어도 연극이 자립할 수 있는 정도의 경영기반을 가져야겠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보다 더 추요한 문제로서 연극이 언제까지고 「아마추어」적 미연과 자기만족에만 저미하는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원래 「아마추어」정신은 우리 신극운동의 초창기에 있어 새롭고 싱싱한 전진에의 추진력의 일부를 이루어온 것은 사실이다. 상업주의에 빠지고 대중의 저속한 취미에 영합하기 쉬웠던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아마추어」만이 가질수 있었던 실험과 반속정신은 한국연극을 통속과 침체에서 건져주는 좋은 영양제가 되었다. 앞으로도 그러한 의미의 「아마추어」정신은 연극의 전진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전체가 언제나 「아마추어」적인채 한국연극을 정립시킬수는 업삳. 「아마추어」가 일정한 시기를 경과할 때 노숙해지고 전문화되듯이 한국연극도 이미 직업화되고 좋은 의미의 「프로」가 되어야 했을터인데 현상은 여전히 전문화이전의 경지에서 저미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 아닌가. 그로 말미암아 관극대중과는 거의 단절된채 연극할동이 이루어지고 그 단절현상으로 해서 고정된 관객층은 얻어지지 못하고 관객이 없음으로 해서 연극제작은 항시 불안과 위험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악순환은 물론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언제나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연극활동으로 해서 진보와 발전의 계기는 놓쳐지고 만다. 직업화의 중요한 목표의 하나라고 할 연극인의 자활은 거의 기대밖의 것이 되어버리고 그들은 별도의 생계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수 없다. 연기수준이 오르지 못하거나 선후배의 층(연령이나 경험연수를 통틀어) 이 두터워질 겨를을 갖지 못한다.
작품면에 있어서도 창작수준의 저조는 언제나 가실 길이 없어 유능한 극작가는 보다 나은 보수를 바라 극작의 붓을 둔화시키거나 전직해 버리기가 쉽고 많은 인재를 이끌 기회가 줄어진다. 창작수준이 낮아짐에 EK라 거기 비례해서 연극은 재미없게 될 것이 명백하며 관객의 발길은 그만큼 더 멀어지고 또 그만큼 전문화·직업화의 공산은 줄어진다. 다시 그 한가지 한가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창작극의 부진 「오늘의 문제점」제기를>
우리 연극이 구미의 번역극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사태는 지금 한국 연극의 내일을 위해 위험천만한 적신호가 되어 있다. 첫째, 극작가의 수가 모자라고 그들이 쓸 수 있는 기회가 적고 또 질적수준이 얕다. 우리 연극의 오늘의 수준이 과거의그것에 비해 저하됐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평가의 차이가 있겠으나 한가지 뚜렷한 사실은 오늘의 창작극이 오늘의 문제의식을 그속에 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가 과거보다 왜소해졌다고 단정할 수 있을만큼 과거의 유산이 두드러졌다고 보는 사람은 드물겠으나 다만 「스타일」만이 달라졌을 뿐 내용은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거기 대꾸할 아무런 구실을 찾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그러나 극작가의 경우, 고충은 이중 삼중으로 크다. 그에게는 쓰여진 작품만으로써 평가되기보다 무대의 성과여하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시나 소설의 경우와 달리 활자화되어 발표되는 기회가 드물다. 그뿐만 아니라 「매스콤」의 대두와 더불어 방송·영화 등에서의 유혹이 심하다. 비록 그것이 세속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보상받지 못하는 자의 고통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더 근본적 문제로서 지적에 두어야 할 점은 우리 연극이 두드러진 희곡의 전통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역사적 조건이다. 전통이 거의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의 극작가는 스스로 개척자요 자기가 초창기에 처해 있다는 의식을 버릴 수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운 장벽들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창작극의 새로운 활로를 열 수 있는 처방은 어떠한 것일까. 손쉬운 길은 없다. 다만 무엇보다도 바라지는 것은 좋은 인재의 양성이다.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보다 양성을 위한 의식적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비단 극작가 뿐만 아니라 배우를 위시한 연극인 양성에 조직적 노력이 아쉽다. 그런 방도의 하나로서 「워크숍」 형식의 활동은 장려할 만하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극작가에 대한 사회일반의 얕은 평가를 광정하는 일이 긴요하다. 특히 한편의 희곡을 써도 그보다 공이 더 든다고는 결코 볼 수 없는 「시나리오」나 「라디오」·「텔리비젼」 「드라머」의 몇분의 1의 보수조차 얻기 어려운 상태를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 경제적 뒷받침을 위해서는 특히 그 것이 무대상연과 직접적으로 결부되기 때문에 어떤 제도적배려가 아쉽다. 한가지 가능한 경우를 든다면 극작가의 「풀」제도같은 것을 두어 수시로 적절하게 대비할 수 있다면 적어도 현재와 같은 창작극의 전면 기근상태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기자의 기근 너무조급했던 「신인등용」>
인재양성의 문제는 배우들의 경우, 더욱 그 필요성을 절감한다. 현재 우리 연극의 전문화가 지연되는, 적어도 외형적인 면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노련한 연기자의 부재에 있다. 지금 중견급 연기진의 대부분은 지난 5, 6년 사이에 「데뷔」한 층으로서 그들에게 보다 더한 정진과 연마를 기대해야하는 형편에 우리 연극은 그 상한수준을 걸고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요는 배우의 층이 두텁지 못하여 외국의 경우 같으면 40대가 중핵이 되어 있는 그 무게를 잃고 있는데 있다.
그 연유야 어떻든 미처 숙달에 이르지 못한채 연극의 어느 수준을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을 이들이 지워지게끔 되었다는 사실은 불행한 부작용을 낳았다. 첫째, 그들은 자기에게 알맞은 정도로 연기를 쌓아올릴 기회를 잃었다. 수련의 기회가 드물게 되었고 배워야할 선배가 없었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모색의 헛된 노력을 낭비케 하였다. 거기다 「매스콤」의 유혹이 연극자체의 부진과 더불어 그들의 정신을 산란케 하였고 시간을 무자비하게 앗아가 버렸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가 얽혀서 연기면에서만 볼 때도 현재의 우리 연극은 허술하고 짜임새없는 무대가 거의 대부분이고 거기서 오는 인상은 때로는 단순한 수련의 부족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불성실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특히 신극운동에서 가장 추요한 것으로 강조되어온 연기 「앙상블」의 형성은 거의 기대해볼 희망조차 없는 것이 실정이다. 지금 수적으로 그리 많지도 않은 일선극단들 가운데도 연기자 결핍의 현상은 두드러지며 금년들어 그 결핍을 메우느라 미봉책으로서 택한 신인등용책은 비록 신인양성이라는 견지에서는 환영할 수 있을망정 너무 조급했다는 느낌이 짙다. 이점과 아울러 지적해 두어야할 점은 세계 다른 곳에서는 상호협조의 정신아래 제휴가 이뤄지고 있는 연극과 「매스콤」(특히 텔리비전)과의 연기자교류(라기보다 무대배우의 등용)가 우리나라에서 만은 연극활동을 위해 저해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앞으로 서로가 이로운 방향으로 새로운 조정과 이해가 있어야만 양자에 다같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무대연기자의 본격적양성이 궁극적으로는 방송 또는 영화에의 인재공급원이 된다는 것은 서구각국의 경우 공통된 현실이며 연극이 그 점에 인색할 아무런 필요도 없다. 그러니만큼 연기자 양성을 위한 방도 및 뒷받침은 공동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인의 자세 자기수련과 집단적 노력>
이점과 관련하여 한마디 지적해 두어야할 것은 특히 배우를 중심으로 한 한 연극인의 「모럴」이다. 사회가 연극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 또는 냉담하다는 푸념을 하기에 앞서 연극인 자신이 얼마만큼 자기수련에 전념하였으며 무대예술이라는 집단의 노력에 힘을 모으고 있는가 반성해 봄직하다. 앞서 말한바 연극의 직업화·전문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체정비가 요청되는데 작금의 연극계는 그 내부에서 안일로부터의 탈피를 위한 노력이 소홀하다는 평을 듣는다.
무정견한 「레퍼터리」의 선정, 극단 자체의 역량을 도외시한 공연계획등 기획의 부주의는 차치하고라도 특히 연기자들의 전속 탈락 등이 그들이 속해 있던 극단의 활동을 둔화시키는 일에서부터 공연시의 배역, 「트러블」, 연습의 태만 등등 집단의 질서를 문란시키는 사례가 적지않다는 사실은 연극의 본격화를 위해 백해무익하다. 집단적노력이 필요한 곳일수록 질서가 요청됨은 말할나위조차 없거니와 현대연극은 한 개의 작품을 무대위에 올려놓는데 중심적 존재(연출자)를 강조하고 있다. 근래의 공연들이 특히 연출자들로부터 질서에의 호소를 하게끔 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연극인자체의 자세확립이 소홀하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점과 아울러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극단활동의 강화이다.
현재 우리나라 연극은 몇 개의 중추적 극단활동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연간 1, 2회의 공연 총계가 곧 우리 연극의 총화를 의미하고 있는 실정인데 관객동원의 미흡, 성과의 부족등등으로 해서 극단경영은 언제나 적자를 면치못하고 있으며 연기인재의 부족이 우심하다. 이러한 상태아래서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자체가 어쩌면 가상할 일일는지 모르되 내일의 안정을 위해서는 극단자체의 공고한 결속이 전제가 됨을 중언복언할 필요조차 없다. 각자가 특색을 지닌, 그리고 서로 보완할 수 있는 성질의 극단들이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데서만 연극은 내일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정책적인 배려 「보호」되어야하는 예술>
사회일반이 이렇듯 침체된 연극을 위하여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몇가지 정책적 고려가 생각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로 움직이고 있는 극단은 국립극단이고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 국립극장이다. 국민의 세금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는 이 민족예술의 전당이 제구실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부진의 원인을 몇가지 들자면 첫째는 예산이 너무나 부족하다. 전속연기자들에게 월수당조차도 내지 못하고 있는 예산으로써 무엇인가 큰 기대를 한다는 것이 잘못이다.
이 점은 매년 입법부에서 문제가 된다지만 국립극장이 수입을 본다해서 이것을 마치 전비사업이나 그밖의 국영기업체처럼 생각하여 수익면에다 중점을 두고 그 활동을 평가함은 옳지 못하다. 공연뿐만 아니라 인재양성까지도 맡아야할 국립극장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자면 많은 증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위정자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 거의 세계 어느곳에서건 순수연극은 자체의 수입만으로 유지가 불가능하다. ??개가 공공적보조를 받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문화의 찬란한 유산으로서 정신과 정서의 더할나위 없는 영양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해서라도 유지에 열심인 것이다. 국립극장에 관한 둘째의 건의는 그것이 극장예술가의 손으로 넘어와야겠다는 점이다.
돈은 나라가 뒷받침하되 운영은 예술가의 손에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 두어야겠다. 이 두가지점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빨리 이루어질수록 국립극장은 제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은 「보호」되어야하는 예술이라는 생각이 세계적으로 통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에 넣어볼 때 정부건 공공이건 간에 연극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경제적보조의 형식을 취할수도 있을 것이요, 학교교육과 연결시켜(국어순화의 견지에서나 정서교육의 견지에서도 필요) 「스피치」교육의 강화의 방향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문화의 향상책의 일환으로서 연극 「서클」을 장려하는 운동, 각 직장에 파고 들어가 자립연극 「서클」을 조직해도 좋다. (연극은 딴따라라는 편견이 상금도 일부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면 그것은 하루속이 뽑아야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그 숱한 대학의 연극과 내지 「스피치」과의 졸업생들이 자기네 국어교사로서 얼마만큼 언어순화에 공헌했으며 소도시의 연극「붐」이 지방문화발전에 얼마만큼 도움을 주고있는가 타산지석으로 알아들만하다.
끝으로 사회가 연극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것이 아니라 연극으로 하여금 얻는 것이 있다면 연극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잠재적관객을 끌어내어 극장으로 오게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을 공고한 관객층으로 조직하여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연극이 현재의 영양실조 상태에서 벗어나 그것이 재미있고 또 단순히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우리 인생을 살찌게 해주는 도움이되고 보다 밝은 내일을 위해 격려가 되는 그런 예술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난관과 장벽이 가로놓여 있지만 내일의 연극은 그것들이 허물어진 곳에서 새로 일어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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