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노라, 보았노라, 구찌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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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한 소비활동으로 한국의 내수시장은 활기를 띄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상 : 노조에 남은 최후의 한사람
전자 상거래 : 구겨지지 않는 옷
[특집] : 한국경제가 타오른다

한국 경제 부활의 구세주 격인 최주희양을 만나보자. 그녀는 부모들로부터 받는 용돈 이외에도 두개의 신용카드를 사용해서 옷 값과 친구들과 마시는 술 값, 그리고 심각할 정도로 비싼 핸드폰 사용 요금(그녀의 아버지는 절약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녀의 핸드폰을 한 달간 사용정지 시킨 적도 있다)등에 한달 최소 600 달러(약 80만원)이상을 사용한다. 그녀가 가장 아끼는 소지품은 페리가모 신발이다. 또 그녀가 요즘 너무나도 갖고 싶어하는 물건은 프라다 운동화이다. 최근 나선 쇼핑 길에서는 DKNY 흰색 면티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이라고 말하며 참견한다. 하지만 그날 저녁때쯤 최는 70달러짜리 푸른색 랄프로랜 셔츠 두벌을 쇼핑백에 들고 다닌다. "요즘 애들은 돈 무서운 줄을 모른다. 정말 생각이 없는 건지 보는 건 다 갖고 싶어한다"고 그녀의 어머니는 말한다.

올해 스무 살인 최양은 방글라데시만큼 가난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그녀 부모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야말로 현재 한국 경제가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 속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성장세를 거듭하게 만드는 원인중 하나이다. 한국은 지난 10년 동안 조선에서 반도체까지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왕성한 생산 활동을 벌이며 수출 강국으로 도약했다. 한국이 4년 전 아시아지역에 닥친 경제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국제 무역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최근의 경기 침체에 대해서는 그 사정이 좀 다르다. 미국 수요의 하락에도 경제가 다시 어려움에 빠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법으로 성장의 활로를 찾아 사실상 침체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이다. 바로 내수 시장이다.

파산한 대우 자동차나 도산 직전의 하이닉스 반도체 등 아직도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경제위기로 인한 구조조정 노력을 아끼지 않은 덕에 한국 경제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해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국제 투자 기관들 역시 한국을 발전 중인 국가로 분류해 두고 있어 자신감도 충만한 상태다. 소비자 신뢰 역시 급속히 상승하고 있으며, 지난주 600여개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해 본 결과 기업신뢰지수 역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주가도 연일 상승세를 거듭하고 있어서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9.11 테러 사건 이후 75%나 뛰어 올랐다.

유럽 경제가 휘청이고 미국은 이제야 막 회생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가운데서도(물론 일본 경제는 여전히 침체의 늪에 빠져있다), 한국 경제는 올해 성장률을 3.2%에서 높게는 6%까지 내다보고 있다. 이 수치는 올해 정부 공식 목표 성장률을 7%(그다지 믿을 만한 평가는 아니지만)로 잡고 있는 중국과 함께 한국이 아시아 지역 내에서 고도성장을 계속 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노무라 증권 한국 지사의 시장 분석가이자 주식 거래인인 폴 프레슬러는 "한국은 이 지역 여타 어느 국가보다 구조조정과 외국 투자자본 유치를 훌륭하게 해냈다"고 평가한다.

제조업 관련 산업의 확장과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해 나가는 중국과는 달리, 한국 경제의 성장 요인에는 서비스업 관련 분야의 힘이 지대하다. 2000년 한국 경제 지표에서 제조업 분야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2%였던 반면 3차 산업 분야는 43%로 더 컸다. 4천700만 인구가 지탱하는 내수 시장은 1987년 당시 GDP의 50%에서 58%로 증가했다. 또한 2000년부터 현재까지 3차 산업 분야에서 1백만 명 이상의 일자리가 새로 생겨났다. 앞으로 한국은 아시아 지역 내에 최초로 공업화 주도 국가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내수 경제 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민들은 불황 속에서도 경기 회복에 대한 자신감을 잃지 않으며 지난 9.11 테러 사태 이후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내구 소비재의 소비를 꾸준히 늘려 왔다. 지난해 자동차 판매도 145만대로 5% 상승하는 등, 한국민의 지난해 4/4분기 소비지출은 전년도에 비해 9.4%나 상승했다. 건설업 분야역시 활황이며, 가정 인테리어 개조 사업이 갑작스러운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년 사이 세련된 현대 감각의 실내 인테리어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많은 수의 값비싼 고급 가구 상점이 새로 문을 열었다. "5년 전만 해도 가정 인테리어 개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고작 20%정도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너도나도 하고있다"고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유영철씨는 말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먹고 즐기는데 점점 더 많은 소비를 하고 있다. 값싸고 실용적인 샴푸보다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바디케어 상점으로 달려가서 이국적인 향취의 헤어젤이나 값비싼 모발 관리 제품을 사고 있다. 스포츠클럽의 숫자도 증가하고 있으며 요가 학원은 수강생들로 가득 차 있다. 한국인들은 외식과 영화 관람에 점점 더 많은 지출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98년 당시 25%에서 46%로 급등했다. 영화 관람이 끝난 뒤 서울시내 곳곳에서 마구 생겨나고 있는 커피 전문점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띈다. 스타벅스 같은 외국 커피 체인점과 수십여개의 국내 업체들이 2년 전에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던 커피 전문점 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사람들은 종이컵을 들고 돌아다닌 다는 데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마치 뉴욕 시민이 된 것 같은, 그런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고 서울 근교 분당에서 '카페 이탈리아노'를 경영하는 안웅천씨가 말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우리는 소비자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회사를 만들어낸다. 내수소비의 확대로 첨단 산업 및 서비스 산업 분야에서 신규 창업이 증가하면서 업종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첨단 산업 분야만 해도 1997년 당시 GDP의 8% 수준에 머무르던 것이 현재는 15%나 차지하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 www.freechal.com에 접속해 보면 아주 간단하게 새로운 한국경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는 인터넷 포탈 서비스 상품 중 하나인 아바타는 인터넷 대화방에서 사용자의 모습을 대표해주는 디지털 만화 캐릭터이다. 프리챌사는 아바타 사용을 지난 6월부터 유료화 하기 시작했다. 현재 약 11만명의 사용자들이 이 가상 종이 인형을 위한 옷가지와 장신구를 사는데 한달 평균 2.3 달러를 쓰고 있다. 얼마 안 되는 액수 같지만 이 회사는 무형의 지적 재산만을 갖고서 공장부지 한평 필요 없이 연간 2백 4십만 달러의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산업의 다양화 덕분에 한국의 전형적인 기업 형태인 대기업 이외에도 많은 수의 일자리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 이런 대기업들은 그간 경쟁력 유지의 명분으로 많은 인원감축을 꾀해왔다. 아시아에 경제 위기가 밀어닥치던 당시 심경주씨는 대기업인 SKC에서 게임제작 관련 업무를 맡고 있었다. 심각한 자금 압박을 받게 된 재벌들을 자신들의 문어발식 족벌 경영 방식을 정리해야 했고, 이런 상황에서 심씨는 정부로부터 벤처 자금을 지원받아 자신이 근무하던 부서를 위자드 소프트라는 소프트 웨어 업체로 만들었다. 무능하던 재벌 경영진의 간섭에서 벗어나, 심과 그의 동료 게임 제작자들은 곧 '쥬라기 원시전 2' 같은 히트 상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1999년 창업 당시부터 계속 순익을 보고 있다. 심사장은 전에 근무하던 회사의 경영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게임 산업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결정을 미루고 사사건건 방해만 놓기 일쑤다. 위자드사는 빠르고 효율적이다."

약간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한국은 혹독한 시련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1997년 닥친 경제 위기로 인해 정부 당국은 부실한 재정 시스템을 깨끗이 정리하고 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지목된 높은 부채 비율을 가진 거대 재벌 기업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등 국가 도산의 위기를 막을 일련의 특단의 조처를 행하게 되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 그중 특히 일본의 경우를 보면 부실기업 및 수익성 없는 자산 등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늑장을 부리는 모습이었지만 한국은 이를 가차 없이 해냈다. 일례로 한국은행은 부실채권 처분에 적극적으로 나서 지난 해 한 해 동안만 이를 55%나 감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부실하고 경쟁력 없는 기업체에 대한 부실 채권만 쌓여가는 일본은행들은 파멸위기에 직면해 있다.

또한 한국정부는 신용카드 사용 제한을 완화 하는 등의 방법으로 오랜 기간동안 묶여있던 소비자 수요의 고삐를 풀어 놓았다. 한국 정부는 한때 국내 제조업 관련 산업 확장을 위한 자본 수급의 방법으로 저축을 정책적으로 적극 권장 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국민들은 저축을 줄이고 소비지출을 늘리고 있다. 1987년과 비교해 한국 국민들의 GDP대비 저축률은 10%나 하락했다. 반대로 여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국내 저축률이 스크루지 뺨칠 정도로 높은 상황이다.

한국 사람들은 모든 지불을 현금으로 했었다. 하지만 신용카드의 신속·간편함과 사용시 받게 되는 세금 환급 덕분에 소비자들의 카드 사용이 늘고 있다. 서울대학교 직원인 서은희씨는 "카드는 참 쉽고 재미있다. 나는 옛날보다 소비량이 많이 늘었다. 예전에는 백화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살 수 없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2,350억 달러의 상품이 신용카드로 구입됐다. 98년에는 500억 달러도 안 됐다. 한국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구매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당국은 한때 자동차나 집 같은 고가 물품을 구입하기 위한 은행의 개인 신용 대출을 억제 시켜왔다. 하지만 이제는 대기업 관련 대출 보다 소액의 개인 신용 대출이 은행의 수입을 보장해주는 안전한 방책이 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방식의 소비자 대출로 인해 수백억 달러의 자금을 끌어 올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의 신용 등급 평가 기관인 무디스사의 수석 분석가인 토마스 바이른은 한국이 경제 위기를 통해 좋은 교훈을 얻었고 이를 통해 기업과 정부 당국은 편협함을 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이른은 최근 서울에서 한국 경제 상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무디스사는 한국의 외자 차입 비용을 절감시켜줄 외환신용등급 상향조정을 검토 중이다. 과거에는 정부 당국으로부터 필요한 핵심 정보를 얻어내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바이른은 말한다. 이제 바이른은 재정경제부 차관의 집전화 번호를 갖고 있으며 가끔 그와 함께 독한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과거에는 재경부 장관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국 경제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기업의 경영 합리화가 여전히 시급하다고 말한다. 과거 수십 년 동안 한국 경제는 대개 정부 정책 주도로 이끌어져 왔다. 오늘날에는 자유방임주의와 자유시장 원칙이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족벌 중심으로 경영을 하고 있는 재벌 그룹들은 주식 투자자들이 좀더 경영에 참여해야한다는 주장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경영 투명도에 있어서 아직 국제적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부채 비율 역시 지나치게 높은 상황이며 좀더 신속하게 부실기업을 정리할 수 있는 파산법의 개정(현재 논의 단계 수준)도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아직 부실기업들이 많이 남아 있다.

미국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점도 한국 경제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한국의 가전제품 수출업체들은 미국에 휴대 전화, 음향기기, 냉장고 등의 판매량을 늘림으로써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매끈한 DVD 플레이어는 벌써부터 미국 소비자들이 꼭 갖고 싶어하는 제품이 되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제조 업체이기도 한 삼성전자는 미국 첨단 산업 분야의 경기 회복으로 상당한 경제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외에도 한국의 조선회사나 자동차 제조 업체 등 다른 재벌 기업들의 무수히 많은 하청 업체들도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한국의 대미 경제 의존도는 과거보다 많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현 김대중 정부는 지금까지 경제 정책에서 꽤 좋은 점수를 받고 있다. 하지만 재경부의 관료들은 여전히 부실 대기업들의 정리 문제를 자꾸 뒤로 미루고 있다. 물론 현대와 대우의 예를 통해 아무리 거대 기업이라 하더라도 부실기업은 퇴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확인 되었다. 정부 당국은 국영 금융기관 및 사업체들의 매각을 서둘러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전력 민영화 반대 파업 시위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험난한 과제가 될 것인지 알 수 있다. 더군다나 6월엔 지방선거를, 올 말에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양같은 한국 젊은이들이 계속해서 소비를 늘려주기만 한다면 한국 GDP는 꾸준히 상승할 것이고 좋은 시절도 지속될 것이다. 이제 DKNY 스커트를 사는건 어떤가?

Donald Macintyre (TIME) / 오병주 (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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