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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신 앞에서의 자기 소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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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주철환
JTBC 대PD

‘무한도전’을 즐겨 시청하는 내 또래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가요무대’를 방청하는 젊은이만큼이나 특별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 토요일 오후에 세대 공감을 목표로 제작된 프로는 따로 있다. 바로 ‘불후의 명곡’이다.

 기획 의도는 좋은데 가끔은 ‘불후’의 명곡이 ‘불효’의 명곡이 되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재해석도 좋지만 원곡의 맛을 거의 죽여버리는 편곡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오리지널을 부른 가수를 앞에 모셔놓고 ‘이제 당신의 시대는 갔다’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주말의 기분을 살짝 흔들었던 기억이 난다.

 ‘호랑나비’를 부른 가수 김흥국씨는 지금도 방송에 출연하면 자기를 10대 가수라고 소개한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도전 골든벨’에 출연한 10대들이 들으면 의아할 것이다. “저분이 몇 살인데 10대 가수예요?” 드디어 베일을 벗는 세대 장벽. 연말에 방송사에서 뽑던 10대 가수 시상식 없어진 게 언젠데.

 ‘그대 모습은 장미’를 부른 민해경씨도 ‘불후의 명곡’에 초대받았다. 우리 세대에겐 여전히 10대 가수(받아쓰기를 시키면 지금의 10대 절반이 민혜경이라고 쓸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인 그의 히트곡 중에 ‘존댓말을 써야 할지 반말로 얘기해야 할지’라는 노래가 있다. 그 제목이 유난히 와 닿았던 실화 한 토막. 신촌에서 목동 방면으로 운전하며 가는 중에 옆 차선의 소형차 한 대가 계속 가까이 따라붙는다. 인사를 하려는 모양인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 드디어 그쪽이 창문을 내리며 아는 체를 하는데 나는 속으로 적잖이 당혹스럽다. 과연 나는 그에게 존댓말을 써야 하나 반말로 얘기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모험은 시작됐다. 이럴 땐 선수를 치는 게 이기는 거다. “야, 오랜만이다. 너 어디 가니?” 오디오가 전달된 순간 상대방의 표정이 급변한다. 황당하단 표정이 역력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반응은? “저 아세요?” 아, 큰일 났다. 이제는 순발력이다. “죄송합니다. 아는 후배랑 워낙 닮으셔서.” 솔직히 그와 비슷한 외모의 후배나 제자는 없다. 그가 묻는다. “혹시 일산 어떻게 가는지 아세요?” 그 다음부턴 지극히 정상적 대화다. 내비게이션 세대에겐 앞의 상황이 ‘순간포착 어떻게 그런 일이’로 들렸을 것이다.

 직장을 몇 차례 옮기다 보니 호칭도 여러 개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그와 맺은 인연의 장소가 자연스레 기억의 레이더에 잡힌다. “교수님 여전하시네요”라며 다가오면 영락없는 대학 제자다. 제자들이 일하는 업종도 다양하다. PD나 기자, 아나운서를 바라보며 전공을 택했지만 세상이 그들을 모두 꿈의 공장으로 데려다주진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면 근황문답보다 옛날 얘기하는 시간이 더 길다. 추억의 퍼즐놀이에는 각종 캐릭터가 두루 등장하여 현실의 무게를 잠깐이나마 줄여준다.

 대학인데도 내 수업은 약간 달랐다. 중간고사 끝나면 매 학기 소풍을 갔다. 함께 공부하면서 친구들 이름도 모르는 게 안쓰러웠다. 경쟁자만 양산하는 대학의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소풍 가는 차 안에서, 혹은 빙 둘러앉아 김밥을 먹으며 각자 자기 소개를 하도록 유도했다. 내가 주력한 일은 두 가지였다. 학생들끼리 친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과 인상 깊게 자기 소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요즘 ‘짝’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효과적인, 아니면 역효과가 생길 만한 자기 소개법이 자주 나와 그때 생각이 난다.

 친구는 동정이나 동경이 아니라 동행의 대상이다. 세상은 친구를 만들어주지만 세월은 친구를 확인시켜준다. 살면서 친구를 많이 만드는 게 즐겁지 아니한가. 게다가 친구를 많이 만들어주는 건 보람된 일 아닌가.

 교수 시절 워싱턴대학(UW)이 자리한 시애틀 근교 쇼라인이라는 곳에 방학 동안 머물면서 매일 한 시간씩 산책을 했는데 반환점이 공동묘지였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과 상상으로 대화하며 만약 내가 죽고 난 후 신 앞에서 자기 소개를 할 땐 어떻게 하는 게 멋질까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 그런 일이 생겨 살아온 이력을 나열한다면 아마도 중간에 제지당할 것 같다. “저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 했고 실제로 친구가 없는 외로운 이들에게 친구를 많이 소개시켜 줬어요.” 정답은 아니지만 명답 소리 정도는 듣게 되지 않을까.

주철환 JTBC 대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