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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6000억짜리 기술 중국에 샐 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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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해 9월 말 L사 시스템 에어컨 사업부 엔지니어링팀. 주말 새벽이라 경비도 소홀하고 인적도 없는 사무실에 팀장 박모(50)씨와 팀원 윤모(43)씨가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의 PC에 들어 있던 자료를 노트북으로 복사했다. 그러면서 PC 보관 자료는 모두 삭제했다. 연구 결과가 담긴 파일박스 8개도 챙겼다. 그들이 복사한 건 L사가 649억원, 정부가 86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빌딩용 에어컨의 핵심 기술이다. 이는 세계 최대 용량의 시스템 에어컨 기술로 업계에서 향후 3년간 1조6000억원을 벌어들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그 다음달 마카오에서 중국의 경쟁사 관계자와 만나 협상을 했다. 협상 직후 잠시 귀국한 이들은 회사 측에 기술 자료를 볼모로 “29억원을 내놓으라”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나 이들은 기술 자료를 중국으로 넘기지도, 회사로부터 돈을 받아내지도 못했다. 9월 말 관련 첩보를 입수한 국정원에 꼬리가 밟힌 것이다. 국정원은 사안의 긴박성을 고려해 집중내사를 통해 범행 일체를 확인한 뒤 서울중앙지검으로 넘겼다. 윤씨와 박씨는 검찰의 압수수색 과정에서 노트북을 화단 밖으로 던지는 등 증거 인멸도 시도했지만 결국 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단독 최규현 부장판사는 23일 윤모씨와 박모씨에게 징역 4년과 2년씩을 선고했다. 평범한 엔지니어였던 이들이 산업스파이로 돌변한 건 회사 돈 수억원을 빼돌린 사실이 적발되면서부터다. 이들은 2009년 6월~지난해 5월 각각 부인과 내연녀 명의로 회사를 만들어 두 곳에서 번역 용역을 받은 것처럼 꾸며 3억1000여만원을 챙겼다. 또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고 국책카드로 결제한 뒤 구입처에서 대금의 70%를 돌려받는 식으로 3억6000만원을 횡령했다. 이런 식으로 회사에 모두 8억원가량의 손해를 끼쳤다. 이들은 이렇게 챙긴 돈을 해외 원정도박과 명품 구입비로 탕진했다. 이들의 행각은 지난해 9월 회사 자체감사에서 들통났다.

 국정원의 산업기밀보호센터가 지난 5년간 적발한 국내 기술 불법 해외 유출은 모두 202건에 달한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는 해마다 평균 40여 건씩 적발되다 지난해엔 30건으로 줄었다. 이에 대해 수사당국은 “산업스파이 사건 발생 자체가 줄었다기보다 기술 유출 범죄가 점점 더 지능화·첨단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5년간 적발한 202건 중엔 전기전자 기술이 68건(34%)으로 가장 많았다. 산업기술을 빼돌린 이는 전 직원이 122건(60%)으로 최다였다. 현 직원(40건, 20%)-협력업체 직원(24건, 12%) 순이었다. 전·현 직원이 80%로 대부분의 산업스파이가 회사 내부 사람이었다. 대기업은 2008년 이후 해마다 기술 유출 건수가 줄고 있지만 중소기업은 반대로 늘어나는 추세다. 대기업들은 꾸준히 보안투자를 해 온 반면 중소기업은 기술보호 투자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국정원의 분석이다.

 최근엔 유출 수법과 수단도 매우 다양해졌다. 과거엔 USB나 하드디스크 등 저장 매체 또는 e메일과 웹하드 등의 네트워크가 주로 활용됐다. 그러나 요즘 들어선 카드형 USB를 신용카드로 위장하거나 초소형 USB를 벨트의 버클이나 구두 깔창 밑에 숨기는 등 신종 수법이 등장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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