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은 아시냐" … 국회서 핀잔 들은 장관들 '창조' 남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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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핀잔을 들었다. 오전 외교부가 외통위에 제출한 업무보고 자료에 담긴 ‘창조경제 구현을 위한 과학기술 외교 전개’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유인태 민주통합당 의원=“창조경제 구현을 위한 과학기술 외교라는데, 장관은 창조경제가 뭔지 아시나.”

 ▶윤병세 장관=“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여튼 디지털 시대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외교 하는 입장에서도 창조적인 벤처기업이 활성화되도록 격려해주자 이런 얘기다.”

 ▶유 의원=“잘 알지도 못하면서 과학기술 외교 전개라니 좀 낯간지럽다. 외교관들이 그렇게 창조경제 개념을 잘 파악해서 과학기술 외교를 전개할 능력이 있다고 보나.”

 이를 지켜본 외통위 소속 우상호(민주당) 의원은 기자들에게 “창조경제를 한다고 하니까 외교부마저 ‘창조외교’를 하겠다고 나선 셈”이라고 꼬집었다.

 이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벌어졌다. 고용노동부에서 “창조경제를 뒷받침할 ‘창조인재’를 양성하고, 미래 창조형 상생의 노사관계로 나가겠다”고 발표했다가 똑같은 지적을 받았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님, 창조경제 적용은 기존의 고용·일자리·노사관계 정책에 그냥 무늬만 덧씌워선 안 돼요.”

 새누리당의 환노위 간사인 김성태 의원의 지적이었다.

 창조경제는 박근혜 정부의 대표 브랜드다. 그러자 ‘창조○○’란 조어가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다. ‘창조경제를 위한 과학기술 외교’ ‘창조인재’ ‘창조형 노사’는 물론이고 ‘개성공단 창조경제’ ‘국방 R&D 창조경제’ ‘창조관광’이란 말까지 출현했다.

 통일부는 지난달 27일 청와대 업무보고 자료에 ‘개성공단 해외시장 확대를 통해 창조경제에 기여’한다고 명시했다. 개성공단 제품의 해외시장 확대는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도 이미 추진됐던 일이다. 그걸 새삼 ‘창조경제’로 설명한 이유는 뭘까.

 국방부가 지난 1일 청와대 업무보고 보도자료에서 ‘국방 R&D 투자 대폭 증액, 신무기 체계 투자 확대 등 창조경제 핵심동력 육성’이라고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다. 국방 R&D 확대와 신무기 체계 투자는 과거 정부에서도 국방부의 관심 사항이었다.

 정부가 열풍처럼 ‘창조○○’ 하고 나서니 부처 산하기관이나 민간도 들썩이고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다음 주 ‘관광을 통한 창조경제 실현 방안’ 토론회를 연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최근 금융계 인사를 만났더니 ‘창조금융’을 말하길래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고작 금융을 통해 창조경제를 지원하는 거라고 답해 웃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대통령이 창조를 얘기하니 ‘창조’가 대세인 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이명박정부 땐 ‘녹색’ 열풍이 불고, 노무현정부 시절엔 ‘혁신’이란 말이 풍미했었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기자

 일선 부서에서 대통령의 의지를 받아들여 정책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개념 없이 관성적으로 창조경제를 남발하는 것이다.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창조’란 말은 정부가 그렇게 틀을 정하고 규제하고 지침을 주는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도 지난 12일 민주당 지도부와의 청와대 만찬에서 이렇게 창조경제를 설명했다. “운동화에 IT 기술을 접목해 칩을 넣어서 칼로리 소비를 알려줘 창의적인 경쟁력을 갖추거나, 식물을 베란다에 키울 때 일정 시간이 되면 물을 주게 하는 과학기술을 결합하면 새로운 분야가 창출된다.”

 대통령이 밝힌 창조경제의 가장 중요한 컨셉트는 창의적 발상과 벽을 뛰어넘는 융합이다. 이런 고민 없이 일상적으로 해 오던 업무에 ‘창조’라는 옷만 입혀 포장하는 건, 가장 비창조적이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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