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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노트북을 열며

개성공단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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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지난 11일 개성공단 입주 기업 대표들이 국회에서 민주통합당 지도부를 만나 하소연하는 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한 입주 기업 대표는 “개성 현장에 나가 있는 우리 직원들이 ‘음식이 다 떨어져 먹을 게 없다’고 하자 북쪽 인사들이 아침에 라면을 들고 왔다”고 전했다. 북한이 공단 폐쇄를 위협하며 연일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와중에도 라면은 오고가니 호들갑스럽게 해석하면 끼니는 챙겨준다는 민족적 정서는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보기엔 공단 문제가 워낙 무겁다. 공단은 우리에겐 실익과 고민이 동시에 담긴 두 얼굴이다. 공단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남북 간에 범퍼가 된다. 개성공단에서 서울로 향하는 개성-문산 축선은 63년 전 북한군 6사단이 소련제 T-34 탱크를 몰고 진격했던 남침로였다. 이런 곳에 평소 1000여 명의 남측 인원이 체류하며 5만3000여 명의 북한 근로자가 작업하는 공단이 조성됐으니 국내외에 한반도의 안정감을 말없이 보여주는 상징적 효과가 있다. 민주당이 공단을 집권 기간 중의 ‘업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시에 공단은 북한 안에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대북 심리전 공간이다. 충성도 높은 주민들이 공단 인력으로 충원되겠지만 이들이 결국 접하는 것은 북한보다 발전하고 풍요로운 남한 자본주의와 그 운영 방식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공단 일부 입주 업체에선 ‘북한판 노사 갈등’도 있었는데 화장실에 비치했던 휴지·비누가 자꾸 사라지자 남한 관리자가 이를 없애고 간식으로 지급하던 초코파이 숫자를 줄이면서였다. 이에 북측 직장장(북한 근로자들의 현장 책임자)들이 반발했다. 강성대국 북한에선 소비재와 초코파이가 가외 수입이다.

 그럼에도 세상 일이라는 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공단은 북한이 비합리적인 협박에 나서는 순간 남한으로선 숨은 고민거리가 된다. 북한이 남북 관계 악화를 이유로 공단 통행을 차단하고 폐쇄를 운운하면 당장 체류 인원의 안전이 문제가 된다. 정부로선 뭔가 강력한 대북 대응책을 내고 싶어도 공단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 나라 바깥에선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명목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 특히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놓고 국제사회가 한목소리로 제재에 들어갔을 때 북한이 느닷없이 공단을 문제 삼으면 남한 입장이 고약해진다.

 그러다 보니 공단은 평시엔 남북 간 윈윈의 사례이지만 북한이 돌변하면 언제든지 뇌관이 된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공단 운영과 남북 간 정치 현안을 엮지 말라는 정경 분리의 원칙을 북한에 분명하고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 외엔 달리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적어도 공단 문제가 남남 갈등이라는 2차 혼란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진보도 북한의 공단 폐쇄 위협엔 강력하게 비판해야 하며 남북 동시 책임론으로 물타기를 해선 곤란하다. 그래 봐야 북한만 재미를 보고, 보수의 분노만 초래한다. 이게 제1야당인 민주당이 염두에 둘 자세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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