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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들어앉을 터 제대로 읽어야 값진 작품 나오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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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호 16면

서울 압구정동 EAT 클럽

세계적 건축가의 얼굴은 의외로 온유한 성직자의 모습이었다. 아론 탄(Aaron Tan·48). 국내에서도 눈길을 확 잡아채는 개성 있는 건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싱가포르 출신의 홍콩 건축가. 건물의 독특함만큼이나 성격도 특이할 걸로 여겼지만 완전한 오산이었다. 짧게 깎은 흰 머리에 단정한 검은색 셔츠. 전혀 요란하지 않고 단정하다. 지난달 15일 가족여행차 서울을 찾은 탄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울 을지로 SK텔레콤 본사에서 만났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는 국내에 적잖은 작품을 남겼다. 지난해 5월 완성된 여수 엑스포 SK관으로 그는 홍콩에서 디자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차분하고, 진실하고, 따뜻한 음색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차근차근 들려줬다.

SK텔레콤 본사 설계한 세계적 건축가 아론 탄

-건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설계에 앞서 건물을 세울 장소를 살펴보면 모든 곳이 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장소의 성격과 한계, 그리고 요구되는 사안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건축 프로젝트도 당연히 장소에 맞게 유니크해야 한다. 나의 업무도 장소의 특이성을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건물을 지을 장소가 때론 무척 희한하기도, 너무나 평범하기도 하다. 관건은 그 장소의 특성이 어쨌건 이를 가치 있는 땅으로 변환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5 전주대학교 스타센터.

-예를 들면.
“전주대에 지은 스타센터의 경우 이 건물은 캠퍼스 한가운데에 위치하도록 돼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건물을 통해 대학의 각 과들이 잘 소통되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개의 긴 통로를 설치했다. 더불어 스타센터는 만남의 공간 역할도 해야 했다. 캠퍼스 중앙에 있으면서 소통과 만남의 역할을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에 신경 썼다. 장소의 특이성이 부가가치가 되도록 활용한 사례다.”

-건축에 대한 사고가 유연한 것 같다.
“유연하다기보다는 전략적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 건축에 대한 나의 철학은 단순한 신념에서 출발한다. 신은 여러 피조물을 창조했으며 이들은 서로 각기 다른 개성과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장소의 특성을 존중해야 하며 여기에 맞는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건축에 대한 영감을 얻곤 한다. 또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특성을 파악하기도 한다.”

-많은 건축가가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려 하지 않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건 위험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시간이 가면서 특정한 스타일은 진부해질 수 있다.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한 장소의 특수성을 감안해 건물을 짓게 되면 훨씬 더 유연한 사고와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창조는 어쩌면 과학과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과학이 발견을 통해 진전되듯, 건축도 장소의 특성을 찾아냄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탄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대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은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토목공학의 바탕 위에 각국의 문화적 특성을 접목시킨 건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현재 자신이 세운 RAD(Research Architecture Design)란 회사에서 30여 명의 건축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도시계획 전문가 등을 이끌며 창조적인 건물 설계에 여념이 없다.

-한국에 대한 당신의 인상은.
“개인적으로 서울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바로 ‘십자가의 도시’라는 것이었다. 중국인들 사이에선 ‘십자가의 바다’로 통한다. 나는 그렇게 많은 십자가가 서울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이 땅에 많은 신자가 있다는 의미인 까닭이다. 이런 광경은 다른 대도시에서 볼 수 없다.”

-당신은 기독교 신자인가.
“그렇다.”

-한국에 대한 다른 인상은.
“두 번째로 한국인들은 매우 정열적이고 헌신적이며 사랑을 많이 하는 민족이라는 거였다. 특히 한국의 대학가에서 이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 삶에 있어서 몇 명의 멘토, 즉 정신적 스승이 있는데 이 중 한 명이 ‘희연’이란 이름의 한국 여인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은 나에게 특별한 나라다. 한국에 자주 오고 비교적 많은 건물을 지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런 한국에 대한 인상이 당신의 작품에 어떻게 투영됐나.
“항상 세 가지 요소가 내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제일 먼저 장소다. 한국의 경우 초기 작품이 서울에서 이뤄졌다. 서울은 앞에서 언급했듯 믿음의 도시다. 젊었을 때 대학로·신촌·홍대 앞에도 갔는데 그곳은 에너지로 충만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다. 그곳의 사람들이 어떤 성향이냐도 중요하다. 마지막은 그 건물의 주인이 될 인물의 생각이다. 건물주가 어디에 역점을 두는지에 따라 프로젝트가 달라진다. 예컨대 건물주가 미래지향적이면 그 건물도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하도록 설계하는 게 옳다. 반면에 그가 경제적 이윤 추구에 더 큰 무게를 둔다면 거기에 맞는 모습을 해야 한다.”

-건물주와 많은 대화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설계를 의뢰한 이들과 가급적 많은 대화를 해서 그들의 철학을 들으려 한다. 서울 SK텔레콤 본사와 W호텔의 경우 건물주가 지극히 미래지향적이고 예지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건물주의 사상을 건축물에 반영하도록 노력해 지어진 게 이들 건물이다. 장소, 사람, 그리고 건물주의 철학, 이 세 가지 모두가 매우 중요하고 이들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창작물이 나온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은 전 세계에 걸쳐 세워져 있다. 대표작으로는 홍콩의 AIA 타워, W 호텔, 중국의 청두 클럽하우스, 헤이페이 세일스 사무실 건물, 인도의 타지 드와카 등이다. 모두 혁신적인 디자인과 다양한 컨셉트로 지어져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얼마나 많은 건물을 설계했나.
“한국에서는 서울의 SK텔레콤 본사, W호텔, 그리고 압구정동에 위치한 2개의 작은 건물을 설계했다. 최근엔 도서관과 다른 기능을 합친 전주대의 스타센터와 여수엑스포 SK관도 지었다. 지금까지 18년간 이 분야에서 일해왔는데 매년 평균 2~3개의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그러니 대충 40~50개의 건물을 설계했을 거다. 물론 이 밖에도 실현되지 못하고 제안으로만 끝난 설계 프로젝트도 많다. 정확하게 실제로 이뤄진 프로젝트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실제로 완성됐는지, 아니면 설계 단계에서 끝났는지와 상관없이 프로젝트 모두가 다 나에겐 소중한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아마 200개에 가까운 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 중 30% 정도가 실제 건축으로 이어졌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예술가나 건축가는.
“흥미롭게도 나의 작품 세계에 영감을 준 건 어떤 인물이 아닌 독특한 지역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 홍콩 안에는 구룡성(九龍城)이란 특별한 곳이 있었다. 원래는 중국군이 주둔했던 땅으로 영국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여기만은 차지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영국 땅도 중국 땅도 아닌 기묘한 치외법권 지역으로 남게 됐다. 영국 당국이 물과 전기 정도는 공급했지만 이외에는 전혀 관리되지 않고 불법 이민자들이 몰려들어 사는 버려진 땅이 됐다. 놀라운 건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지혜를 모아 천재적인 방법으로 살아나갔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곳에서 인간들의 지혜를 목격했고 아직도 이때 보았던 것들이 내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후 이 구룡성은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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