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개성·차별성·수월성 떠 받드는 기풍 공유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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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호 25면

박근혜 정부의 제1 국정목표인 창조경제의 청사진이 아직 제시되지 않아 그 개념과 실현 방안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창조경제는 2001년 7월 영국의 경영전략 전문가인 존 호킨스가 펴낸 『창조경제(The Creative Economy)』에 처음 소개되었다. 호킨스는 “창의성은 반드시 경제적인 활동은 아니지만 경제적 가치나 거래 가능한 상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창의성과 경제의 관계를 분석했다. 창조경제에 대해 “원재료는 사람의 재능이다. 새롭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경제적 자본과 상품을 창조하는 끼를 말한다”고 강조하고, “가장 가치가 있는 통화는 돈이 아니라 만질 수도 없고 이동성이 강한 아이디어와 지식재산”이라고 설명했다. 호킨스는 지식재산으로 특허·상표·디자인·저작권 등 네 가지를 꼽았다. 4대 지식재산 산업으로 형성되는 창조산업은 건축·공연예술·공예·광고·미술·비디오게임·산업디자인·소프트웨어·연구개발·영화·완구·음악·출판·TV/라디오·패션 등 15대 분야로 분류했다.

이인식의 '과학은 살아 있다' <18> 창조경제의 4대 키워드

『창조경제』 표지(2001)

창조경제에 관련된 이론도 발표되었다. 2000년 6월 미국 하버드대의 정치경제학자인 리처드 케이브즈는 『창조산업(Creative Industries)』을 펴내고 책의 부제인 ‘예술과 상업 사이의 계약’처럼 예술 중심으로 창조경제에 접근했다. 그는 창조산업을 일곱 개의 경제적 특성으로 규정했다.
①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수요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창조생산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을 사전에 알 수도 없을뿐더러 사후에도 쉽게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②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창조적 노동자는 독창성, 기술적 능력, 전문적 숙련에 관심이 많으며 평범한 일이면 아무리 급여가 많아도 사양할 만큼 예술지상주의자이다.
③잡다한 기량(Motley crew):비교적 복잡한 창조생산품을 만드는 데는 다양하게 숙련된 기량이 요구된다.
④무한한 다양성(Infinite variety):창조생산품은 품질과 독창성으로 차별화된다. 모든 창조생산품은 선택의 다양성이 무한하다.
⑤기량의 등급(A list /B list)-예술가는 기량·독창성·숙련도에 의해 평가된다. 그러므로 기량과 재능에서 조그마한 차이가 상업적 성과에서는 커다란 차이를 야기할 수도 있다.
⑥세월은 유수 같다(Time flies)-다양하게 다듬어진 기량으로 복잡한 계획을 조정할 때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⑦예술에 이르는 길은 멀다(Ars longa)-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어떤 창조생산품은 저작권 보호가 필요할 만큼 수명이 오래 간다. 이 경우 지식재산 사용료가 지불되어야 한다.
2002년 4월 미국의 경제칼럼니스트인 리처드 플로리다는 『창조계급의 부상(The Rise of the Creative Class)』을 펴냈다. 이 책은 출간 10주년이 되는 2012년 6월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2004년 11월 『도시와 창조계급(Cities and the Creative Class)』을 출간하기도 했다.

플로리다에 따르면 창조계급은 ‘도시를 중심으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역동성을 창조하는 전문적·과학적·예술적 노동자 집단’이다. 창조계급은 과학자·기술자·건축가·디자이너·교육자·화가·음악가·연예 종사자·법률가·기업인·금융인 등으로 형성되며 이들의 경제적 기능은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기술, 새로운 콘텐트를 창조하는 것이다.
플로리다는 “창의성은 반드시 지적인 것만은 아니다. 창의성은 종합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창의성은 거친 낟알을 체질해서 쓸모 있는 낟알을 가려내는 것처럼 각종 자료에서 쓸 만한 것을 찾아내서 새롭고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또 창조계급은 예술가이건 과학자이건 기업가이건 창의성·개성·차별성·수월성을 소중히 여기는 창조적 기풍(ethos)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창조계급의 가치는 개성·실력·다양성·개방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창조계급은 창의성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이다.
플로리다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창조계급은 1900년 10%에서 1950년 16.6%, 1980년 18.7%, 1991년 25.4%, 1999년 30.1%로 증가했다. 초창조계급(super-creative class) 역시 1900년 2.4%에서 1950년 4.4%, 1980년 8.2%, 1991년 9.2%, 1999년 11.7%로 늘어났다.<표 참조> 두 계층을 합치면 미국의 창조산업 관련 종사자는 1900년 12.4%에서 1950년 21%, 1999년 41.8%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셈이다. 21세기 초에 창조계급은 미국 노동자 전체 소득의 절반에 해당하는 1조7000억 달러를 챙겼는데, 이는 제조 및 서비스 분야 근로자의 소득과 맞먹는 액수인 것으로 추산된다.

2005년 4월 플로리다는 『창조계급의 비상(The Flight of the Creative Class)』을 펴내고 책의 부제인 ‘재능을 향한 새로운 지구적 경쟁(the new global competition for talent)’처럼 창조경제가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인류가 ‘창조시대(Creative Age)’ 로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플로리다는 경제 성장의 3T 이론을 제안했다. 기술(technology), 끼(talent), 관용(tolerance)이 경제성장의 3대 요소라는 이론이다. 기술과 끼에 관용을 새롭게 추가한 까닭은 필요한 인적 자원을 끌어당기려면 관용이 중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창조경제는 존 호킨스, 리처드 케이브즈, 리처드 플로리다의 이론으로 체계화되긴 했지만 아직도 합의된 정의가 없어 입장과 편의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2008년부터 세계 창조경제 보고서를 펴내고 있는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 역시 창조경제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시도한다. 2008년 4월 펴낸 ‘2008년 창조경제 보고서’에서 창조경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창조경제는 소득 발생, 일자리 창출, 수출 신장을 촉진할 수 있으며 사회적 통합, 문화적 다양성, 인간 개발을 조장할 수 있다.
▶창조경제는 기술, 지식재산, 관광산업이 상호작용하는 경제적·문화적·사회적 측면을 포함한다.
▶창조경제는 개발 차원과 거시적 및 미시적 수준에서 각각 경제 전반에 개입하는 지식기반의 경제적 활동이다.
이런 관점에서 UNCTAD는 2010년 12월 펴낸 ‘2010년 창조경제 보고서’에서 창조경제는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주관적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유네스코 창조도시 네트워크에 포함된 이천(1), 시드니(2), 전주(3). [중앙포토]

한편 창조경제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부상하면서 문화 전문가인 찰스 랜드리가 제안한 창조도시 개념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랜드리는 2000년 『창조도시(The Creative City)』를, 2006년 『도시 건설의 예술(The Art of City Making)』을 펴냈다. 랜드리에 따르면 창조도시는 ‘다양한 종류의 문화적 활동이 도시의 경제적 및 사회적 기능의 필수적 요소가 되는 도시’를 뜻한다. 랜드리는 창조도시가 네 가지 뜻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①창조도시는 ‘예술과 문화의 하부구조’이다. 창조도시는 탄탄한 문화적 하부구조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②창조도시는 ‘창조경제와 창조산업’이다. 창조도시의 핵심에는 문화예술 유산, 오락산업, 창조서비스가 존재하며 광고와 디자인이 창조도시의 혁신을 이끌어내는 원동력 역할을 한다.
③창조도시는 ‘창조계급’과 동의어이다. 창조도시의 한 가지 결정적인 자원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창조적인 사람이 창조시대를 주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④창조도시는 ‘창의성의 문화를 육성하는 장소’이다. 이런 맥락에서 창조도시는 창조경제나 창조계급보다 광범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창조도시는 건물이나 도로와 같은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사람들로 형성된 소프트웨어를 하부구조로 갖춘, 창조경제의 중심이다.

전 세계적으로 60개 정도의 도시가 창조도시라고 불릴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004년 유네스코는 이러한 도시들이 창조산업을 육성하고 있지만 성장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판단하고 ‘유네스코 창조도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 네트워크의 목적은 창조도시들이 창조산업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을 성취한 노하우, 경험, 실행 전략을 서로 공유할 수 있게끔 전 세계적으로 문화적 집단을 형성하는 데 있다. 이런 취지로 유네스코는 일곱 개의 주제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 네트워크에 선정된 도시는 문학, 영화, 음악, 공예 및 민중예술, 디자인, 미디어 예술, 요리법(gastronomy) 등 일곱 개 주제 중에서 한 분야를 선택해서 집중적인 노력을 투입한다.

현재 7대 창조산업 분야에서 34개 도시가 ‘유네스코 창조도시 네트워크’ 명단에 등재되어 있다.
▶문학:에든버러(영국), 멜버른(호주), 더블린(아일랜드) 등 6개
▶영화:시드니(호주), 브래드퍼드(영국) 등 2개
▶음악:볼로냐(이탈리아), 글래스고(영국), 보고타(콜롬비아) 등 5개
▶공예 및 민중예술 :샌타페이(미국), 이천(한국), 가나자와(일본), 아스완(이집트), 항저우(중국) 등 5개
▶디자인: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 베를린(독일), 몬트리올(캐나다), 나고야, 고베(이상 일본), 선전, 상하이, 베이징(이상 중국), 서울(한국) 등 11개
▶미디어 예술: 리옹(프랑스) 1개
▶요리법:포파얀(콜롬비아), 청두(중국), 전주(한국) 등 4개

우리나라는 2010년 7월 도자기로 유명한 이천이 23번째 도시로 공예 분야에 선정되고 같은 시기에 서울도 디자인 도시에 이름을 올렸다. 2012년 5월 비빔밥의 도시인 전주가 요리 분야에 선정되어 우리나라는 모두 3개 도시가 명단에 들어 있다.

창조경제, 창조산업, 창조계급, 창조도시 등 네 가지 개념을 찬찬히 음미해보면 우리가 이미 창조경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이인식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KAIST 겸직교수를 지냈다. 신문에 490편, 잡지에 160편 이상의 칼럼을 연재했다. 『지식의 대융합』 『이인식의 멋진 과학』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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