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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땡큐맘' ① 이의정이 말하는 나의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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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딸을 위해 매일 기도한다’는 어머니 전천득씨 품에 이의정씨가 안겼다. 이씨는 “엄마가 없었으면 저는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진 JTBC]

“나~ 이거 참.”

삐죽삐죽 번개머리에,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그가 생기발랄한 목소리로 “나~이거 참”을 외치면 모든 국민은 무릎을 치며 따라 했다. 1996~99년 방영돼 한국판 ‘프렌즈’(미국 NBC 방송의 인기 시트콤)로 대히트를 쳤던 ‘남자 셋 여자 셋’의 헤로인은 단연 그였다. 오후 7시면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끌어모았던 이의정(38)씨를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송지영 기자

“당시엔 정말 바빴어요. 3년 반 동안 오전 6시에 촬영을 시작해 다음 날 새벽 4시에 끝났죠. 잠자는 게 소원일 정도로 한 시간만 자면서 버텼죠.”

특유의 귀여운 목소리와 애교 있는 표정은 마주 앉는 것만으로도 ‘번개머리 의정’을 추억하기에 충분했다. ‘남자 셋 여자 셋’이 한창 인기를 모을 땐 잘생긴 상대 배우 송승헌을 쥐락펴락하는 당당한 모습에 ‘번개머리 신드롬’이 불기도 했다.

 하지만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였을까. 이씨는 이후에도 수많은 드라마와 방송 활동을 했지만 좀처럼 ‘남자 셋 여자 셋’을 넘지 못했다. 사업에도 손을 대 한때 20~30개의 체인점을 둘 정도로 번창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는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한쪽 발이 찌릿찌릿 저려왔고 이따금 마비도 왔다. 토할 것 같은 두통에 결국 그는 2006년 촬영 도중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짧으면 석 달, 길면 1년 반이란 시한부 선고와 함께.

 정확한 원인도 병명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스트레스성’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덧붙여졌다. 병원에서도 크게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씨는 퇴원을 결심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쓰러질 때까지 열심히 살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단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니 맘이 훨씬 편해졌다. 열심히 운동하고 한방치료를 병행하다 보니 병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거의 완치단계에 이르렀다. 그렇게 그는 방송으로 돌아왔다. 2011년에는 주말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일각에선 ‘진짜 아픈 거 맞냐’ ‘안 아팠는데 시청률 올리기 위해 감성팔이를 했다’ ‘연극한다’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뇌종양 발병 초기, 일부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이의정 사망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아픈 시절’에 대한 질문을 가장 싫어한다.

 “병은 다 나았는데도 계속 물어보니까 ‘너 다시 병 걸려라’는 말처럼 들려요. 방송에 출연해도 앞뒤 얘기 다 빼고 자극적인 부분만 편집돼서 나오고요.”

 실망했다. 그리고 섭섭했다. 하지만 이씨는 달라졌다. 30여 년의 방송 활동 시절, 늘 바쁘고 고집불통이어서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그였다. 집 한 채 살 돈을 술값으로 낼 정도로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모든 걸 흡수하고, 흘려보낸다. 술도 끊은 지 벌써 3년째다. 이따금씩 유혹이 찾아왔지만 그를 곁에서 지켜주는 이가 있었다. 바로 어머니였다.

 4남매 중 유독 애교가 많은 막내딸인 이씨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전천득(68)씨는 좌절했다. 늘 딸 사진을 갖고 다니며 ‘자랑스러운 연예인 딸’이라고 자랑하던 어머니였다. 어린 나이에 방송을 시작한 딸이 안쓰러워 늘 촬영장에 데려다 주고 스태프들을 위해 정성껏 간식도 만들었다.

그런 딸이 아프자 어머니는 더욱 부산해졌다. 해외를 돌며 소문난 의사들을 찾아 헤맸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전씨는 매일 절을 찾아 “이 아이만 낫게 해주면 평생 봉사하며 살겠다”고 약속하며 정성스레 불공을 올렸다.

 어머니의 정성 덕분이었을까. 이씨의 건강이 차츰 나아지자 어머니는 약속대로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독거노인 돌봄, 무료급식 봉사, 보육원 방문 등을 하다 보면 하루가 모자랄 정도다. 기도도 쉬지 않는다. 기도 제목은 여전히 같다. “의정이가 잘되고, 다신 아프지 않았으면….”

 이씨와 어머니의 관계가 늘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서울 한남동 단독주택에 살 정도로 부자였지만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부도가 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씨가 태어났다. 이씨는 외할머니로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라는 구박을 들으며 성장했다. 어머니도 유독 막내딸에겐 엄격했다.

 “언니가 잘못해도 제가 혼나고, 제가 잘못하면 두 배로 혼났어요. 연예인 때도 간섭이 너무 심했고요, 35세가 돼서야 제 통장을 가질 정도였어요.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고교 때는 따로 아지트를 만들어 살기도 했죠.”

 엄마와 딸 사이는 간단하지 않았다. “격렬하게 분노하고 격렬하게 싸우고, 그리고 격렬하게 몸을 다 바쳐 사랑한다.… 슬픔의 뼈까지 눈물의 뼈까지 고통의 뼈까지, 다 가슴으로 삭여내면서 침묵하는 이 세상의 엄마들. 바로 딸의 행복을 온몸으로 빌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딸이며, 그 딸은 다시 엄마가 된다.”

시인 신달자는 『엄마와 딸』이란 에세이에서 모녀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씨와 어머니는 늘 부딪쳤지만 어머니는 딸의 행복을 온몸으로 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다시 지켜주는 것도 결국 딸이었다. “어머니가 없었으면 과연 제가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라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나중에 꼭 작은 정원이 딸린 집을 사 드려 효도하고 싶어요.”

 이씨는 요즘 틈틈이 어머니의 봉사활동에도 동행한다. 청주의 한 복지단체에서는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가끔 찾는 미얀마의 한 학교로부터는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2009년엔 장기기증 서명도 했다. “제 몸이 건강하지 않아 장기기증을 해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새 생명을 얻게 될지는 미지수래요. 하지만 제가 죽은 뒤 뭘 가져갈 수 있나요? 그냥 가루 되는 것보다는 좋은 일에 쓰이는 게 의미 있지 않겠어요?”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이씨지만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다. 남자친구는 있다. 그에게 ‘엄마’가 되고 싶진 않은지 물었다.

 “엄마….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지금 이렇게 하루하루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다시 인기를 얻고 싶은 욕심도 전혀 없고요. 나이가 들고, 또 아프고 나니까 뭐가 소중한지 알겠더라고요. 그냥 매일 다른 일상으로 채워지는 것 자체가 신나고 고마울 뿐이에요. 돈 못 벌면 어때요? 사람들이 ‘이의정’ 했을 때 ‘아, 그 여자’라고 기억해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이 기사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땡큐맘 캠페인’ 시리즈의 첫 회로, 중앙일보·JTBC와 한국P&G가 함께합니다. 이씨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8일 오후 7시 10분 JTBC ‘휴먼다큐 당신의 이야기’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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