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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47) 전봉준 (상) - 유홍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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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강한 결단과 포용력>
전봉준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1854년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수리(지금의 전북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에서 향리(평민?)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전창혁은 민란에 가담하여 군아를 습격하다가 체포 장살됨) 그는 짧은 키에 결단성이 강하고 포용력이 있었으며 학식있는 호남아였다.
19세기 말엽의 조선사회는 심한 지반관리들의 탐학과 외국의 정치적·경제적 침투에 반발하는 농민의 봉기가 자주 있었다.
이러한 농민운동은 1893년에 고부군에도 파급되었다. 즉 만석보 개수공사를 기화로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요구한 군수 조병갑에 대한 진정과 규탄이 도화선이 되어 1894년 1월에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봉기한 농민들은 고부군 동학 접주인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전봉준은 1892년 교조신원 운동이 있을 무렵에 동학교문에 들어가 접주로 활약하고 있었다. 당시 동학의 「제폭구민」 「척왜양창의」의 구호는 양반관료의 착취와 외국세력의 침투에 저항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농민군의 지도층은 대부분이 동학 접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포·장접 등의 조직망을 이용하였다.

<잇단 봉기에 선두서>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든 농민군은 군아를 습격하여 창고의 곡식을 군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무기를 탈취하여 관군을 격파하였다. 이러한 기세가 인근 군현에 파급되어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정부는 신임군수 박원명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 해산시키는 한편 안핵사 이용태로 하여금 사후수습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 돌려 심한 박해를 가하였다.
이에 동년 3월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 동학 접주들을 중심으로 한 8천명의 농민군이 재기하였다. 정부는 다시 전라병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관군 8백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전라 영병 2백50명과 보부상 수천명도 합세하였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은 계속 북상하면서 황토현 접전과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크게 격파하고 이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홍계훈은 전주 남완산에 진을 치고 농민군에게 효론책을 쓰는 한편 성내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다. 농민군들은 가슴에 부적을 붙이고 두 차례에 걸쳐 필사의 돌격전을 감행하였으나 막대한 희생을 내고 크게 패전하였다. 사태가 불리해지자 전봉준은 휴전을 수락하는 반면에 수조의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동북문으로 해산 도주하였다. 개혁안의 내용은 조국근대화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반봉건」 「반외세」였다.
한편 자력으로 난을 진압할 수 없었던 정부는 청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청이 3천의 병력을 아산에 상륙시키자 일본은 천진조약의 동시출병 조항을 들어 군함 7척과 육병 7천을 인천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농민군이 자진 해산한 뒤였다. <필자=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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