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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대기의 자의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눈을 지그시 감고 성호를 긋는다. 다시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경건히 기도를 드린다. 그 기도는 언제나 끝이 날지 그는 좀처럼 눈을 뜨려 하지 않는다-.
무슨 종교의식의 「스케치」는 아니다. 3일 하오 5시 TBC·TV에서 실황 중계한 어느 대통령 후보자의 기호 추첨광경이다. 기호 1을 뽑자 환성을 터뜨리는 누구의 표정, 또 기호 몇을 뽑자 시무룩해 하는 표정 등, 그 광경은 「경건」과는 달리, 자못 재미마저 있었다.
「환성」과 「시무룩」은 바로 작대기 투표의 우화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입후보자들은 3명 이상이 경쟁일 때 맨 처음 기호와 맨 끝자리 기호를 행운으로 친다.
그것은 우연표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량한 시민의 양식으로 생각하면 좀 모욕을 당하는 기분도 든다. 아무렴 주먹구구로 그렇게야 찍으랴 싶은 자존심이 꿈틀댄다.
그러나 기호의 당사자들은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역대의 대통령이나 의원들이 기호의 행운아들만은 아니었으니 큰 문제는 아니다. 기호 대신 「악어」나 「사자」 「뱀」 「코끼리」가 득실(?)거리는 동남아 남방국들의 투표용지보다는 우리나라의 것이 훨씬 「문명」적이다. 기호의 장점도 없지 않다. 투표소에 들어가 작대기로 「○」표만 하면 된다. 필적이 남지 않으니 우선 비밀이 온전하게 보장된다. 동성동명의 후보자가 있어도 시비의 여지가 없다. 유효 무효의 판정이 빠르니 개표사무도 능률적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 선상에 걸치게 될 때는 돋보기까지 동원하는 사례가 없지 않다. 구미 제국에선 그래서 「○」대신 「×」를 쓰고 있다. 「×」의 교차점이 들어있는 간을 유효로 판정하는 것이다. 아무튼 작대기 투표만큼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없고 보면 그것을 시비로 삼을 수는 없다. 요는 우연표를 기대할 수 있는 시민의 사회참여 의식이 문제다. 눈을 부릅뜨고, 스스로 선택한 후보자의 이름아래 작대기를 「꽝!」누르는 자의식의 시민정신을 누구나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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