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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한국은행은 어쩌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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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윤호
논설위원

“한국은행이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시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렇게 되면 불행한 일이다.”(2010년 4월 22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하와 중소기업 총액대출한도 인상 등 경제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2013년 4월 1일)

 한은의 독립성에 대한 상반된 입장의 말이다. 전자는 한은이 정부에 질질 끌려다니지 말라는 것이고, 후자는 한은도 경기대책에 협조하라는 주문이다.

 그런데 놀랍지 않나. 두 말이 한 사람 입에서 나왔다는 게. 이 대범한 인식전환을 보여준 이는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다. 그는 과거 한은의 독립을 존중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2008년 초 이명박 정부가 이성태 전 총재를 흔들 때도, 2010년 김중수 총재가 갓 취임했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그의 말은 과거 기억을 싹 지워버릴 판이다.

 물론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독립에 회의적인 시각이 점점 커지곤 있다. 일본이 대표 사례다. 앞서 2010년 국제결제은행(BIS)에선 이론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문이 나오자 스탠리 피셔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가 반론을 폈다. 피셔는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차기 의장 물망에 올라 있다고 하니, 국제적으로 중앙은행 독립성 논란이 어디로 전개될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런 와중에 나온 이한구 발언은 국내에서도 한은 독립에 대한 논란에 불을 댕길 소지가 크다. 특히 집권당 원내대표라는 계급장이 내뿜는 압박이 예사롭지 않다.

 한은이 수세에 몰리다 보니 묘한 현상도 벌어진다. 강골이었던 이 전 총재의 이미지가 김 총재에까지 오버랩된다는 점이다. 사실 두 사람의 스타일은 확연히 다르다. 한은맨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이 전 총재는 좌표에 강하고, 김 총재는 파동에 강하다.

 2007년 11월 이 전 총재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에 참석했을 때다. 그는 공식 일정을 마치고 희망봉으로 가는 길에 폴스 베이에 들렀다. 특이한 지형 탓에 동서남북을 가늠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폴스(false)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도 이 전 총재는 해와 해안선을 연신 바라보더니 “저쪽이 북쪽이구먼”하고 정확히 짚어냈다고 한다.

 그는 해외에 나가면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향(向)을 따지는 걸 소소한 낙으로 삼곤 했다. 평소에도 그는 현재의 위치, 지향해야 할 목표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처신하려 했다는 게 한은맨들의 평가다. 이 때문에 소신은 있어 보이지만 상황이 바뀌어도 궤도수정이 잘 안 되는 게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정부와의 엇박자가 그런 사례다.

 김 총재는 다르다. 외부 파동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신속하게 대응한다. 어디에 가든 자리에 맞는 일을 피나게 하는 스타일이다. 이명박 정부 초대 경제수석 시절 손목에 까칠까칠한 밴드를 묶고 다니며 업무 중 졸음이 오면 벅벅 문질러댔다. 싯벌게진 손목은 워크홀릭의 면모를 잘 보여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 시절에도 공관원들을 입에 단내 나도록 굴렸다. 한은 총재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 휴일마다 자가운전으로 출근했다.

 대학 총장, 연구소 원장, 경제수석, 대사 등 다양한 자리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비결도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다만 그는 한은 총재 취임 직전 “한은도 큰 틀에서 정부”라고 말한 탓에 정부에 주파수를 맞춘다는 비판을 들었다.

 그처럼 파동에 강한 그에게도 이한구 발언은 당혹스러울 듯하다. 김중수로 있으면서 이성태로 행동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판이다. 과거 한은법엔 총재의 요건으로 ‘고결한 인격과 금융에 대한 탁월한 경험’이라는 규정이 있었다. 1997년 법 개정으로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살아 있다. 파동에 강하다는 김 총재의 면모 역시 그런 정신 위에서 드러나길 기대한다.

남윤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