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전혀 다른 재난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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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결말이 너무 궁금해 원작을 찾아 읽고야 말았다. JTBC 드라마 ‘세계의 끝’(극본 박혜련, 연출 안판석)의 원작소설인 배영익 작가의 『전염병』 말이다. 원작을 읽고 나니 어떻게 이걸 드라마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싶다. 소설의 큰 흐름은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훨씬 더 어둡고 오싹하다. 주인공으로 칭할 만한 매력적인 영웅도 없는 데다 되풀이해 읽어야 겨우 이해가 가능한 무수한 전문용어들까지. 여러모로 드라마로 옮기기에 쉽지 않은 작품이다.

 인류 역사에 기록이 없는 괴바이러스에 감염돼 숨진 이들이 발견되고, 질병관리본부에 비상이 걸린다. 역학조사팀과 의학자들의 추적 끝에 이 바이러스가 북극 인근 베링해에서 명태잡이를 하던 어선으로부터 퍼져 나갔음이 밝혀진다. 문제는 이 ‘죽음의 배’에서 살아남은 한 명의 선원. 그는 자신은 특별한 증상이 없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존재, ‘장티푸스 메리’다. 그가 도주하는 경로를 따라 바이러스는 점차 퍼져나가고, 결국 세계를 재앙에 빠뜨리는 대유행에까지 이르게 된다.

JTBC 특별기획드라마 ‘세계의 끝’. [사진 JTBC]

 예기치 않은 재난과 그에 맞서는 인간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재난드라마의 문법을 따른다. 하지만 보통 재난드라마가 재난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강인함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가족애 등을 강조한다면, 이 드라마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재난은 인간의 선의와 희생을 극대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기심과 악의를 증폭시키는 장치다. 오랜 기간 빙하 속에서 잠자고 있던 바이러스를 깨운 것은 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었다. 바이러스 감염자들은 원초적인 증오와 파괴본능을 드러낸다. 확산을 막으려는 사람들조차 영웅이 아닌 내면의 이기심에 쉽게 굴복하는 약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설명은 힘들지만, 소설의 부제로 쓰인 ‘대유행으로 가는 어떤 계산법’의 실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이 문제작을 드라마로 옮기는 어려운 숙제를 맡은 이가 ‘하얀 거탑’의 안판석 감독이기에 믿음이 간다.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하얀 거탑’에서 그는 욕망의 충돌과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한 면면을 원작보다 훨씬 흥미롭고 생생하게 그렸다. 소설과는 달라진 주인공 강주헌(윤제문)의 캐릭터 등, ‘세계의 끝’도 이미 원작과는 조금 다른 재미와 긴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동안 봐왔던 드라마들과 전혀 다른 소재를 전혀 다르게 보여주는 이 작품, ‘한국형 무한복제 드라마’에 지친 분들께 적극 추천한다.

이 영 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