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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우린 엑소더스 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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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자(72·삼성동)씨는 복지관에서 일어 중급반부터 잉글리시 스토리텔러(영어 구연)에 이르기까지 매일 다양한 강좌를 듣는다. 젊은 시절 국립의료원 간호대학 교수를 지냈던 박씨는 은퇴 후에도 이렇게 계속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박씨뿐 아니라 많은 강남 시니어가 가장 많이 찾는 복지관 인기 프로그램은 어학 관련 강좌다. 노래 프로그램이 더 인기인 강남 이외 지역과 대조적이다.

“나이 들면 겪게 되는 네 가지 고통, 즉 노년사고(老年四苦)가 뭔 줄 알아요? 빈고(貧苦·가난으로 인한 고통)· 병고(病苦·병 들어 고통)·고독고(孤獨苦·외로움으로 인한 고통)·무위고(無爲苦·일 없는 고통)예요. 그런데 빈고가 없으면 나머지 삼고(三苦)는 상당 부분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요. 글쎄, 강남 시니어의 상당수는 빈고는 좀 덜한 편이 아닐까 싶은데….”

외환은행 싱가포르지점장을 지냈던 송경(70·압구정동)씨 얘기다.

그의 말대로 평균적인 한국 노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고를 덜 겪는 강남 시니어 38명을 만나 강남살이에 대해 물었다.

글=안혜리·윤경희·김소엽·박형수·송정·정현진 기자 , 사진=김경록기자

돈 많다고 손가락질 마시라 젊어서 피나게 일했으니 …

강남 시니어 38인에게 물었다
강남 복지관은 어학, 강북은 노래교실 1위
강남 시니어는 배우는 것 자체를 즐겨

송씨는 “우리가 젊었을 땐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싶어 스스로 집을 뛰쳐나왔는데 정작 내가 나이 들고 나니 우리 자녀 세대는 자기 자식을 우리더러 키워달라 뭐다 하면서 집을 떡하니 차지하고는 나가질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내가 또 집에서 나와야 한다”면서 스스로를 엑소더스(탈출) 세대라고 불렀다. 송씨처럼 집이 불편해서든, 손주를 돌봐야 해서든, 아니면 뭔가 새로운 자극을 원해서든 실제로 많은 강남 시니어는 다들 집 밖으로 나온다. 나이 들었다고 집에 틀어박혀 있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엑소더스 세대라는 표현이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강남의 엑소더스 세대가 은퇴 후 뭘 하고 지내는지, 또 다른 지역 시니어와는 라이프 스타일 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江南通新이 분석했다.

"돈 무서운줄 아는 세대”

 박모(70·청담동)씨는 “언론에 비치는 시니어는 하루 종일 TV 드라마 보며 나라에서 주는 복지 혜택만 바라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거꾸로 젊은 시절 모아놓은 돈을 무기로 자식에게 부당하게 호령하는 꼰대뿐”이라며 “둘 다 현실을 제대로 담고 있지 않다”고 불만스러워했다.

 강남 시니어는 대부분 “지금 먹고살 만하지만 단돈 1원이라도 함부로 쓰지는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대 상대 동문 몇 명이 모여 같이 바둑을 두려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서초바둑싸롱에 나온다는 서울신문 편집국장 출신인 양혜영(71·분당)씨는 “서초동 살다 2년 전 분당으로 이사 갔다”며 “모임 장소가 주로 강남이라 내가 늘 움직여야 하는데 주로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이날 서초바둑싸롱에 같이 나온 송경씨도 “젊은 애들이 그 비싼 스타벅스 커피 사먹는 거 이해가 안 간다”며 “우리 세대는 돈이 많든 적든 누구나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江南通新이 만난 시니어 대부분은 “무슨 모임이든 회비는 보통 1만원을 넘지 않는다”고 말했다.

 30대부터 부동산에 관심을 갖고 투자해 꽤 많은 재산을 모은 이순자(82·여·서초동)씨는 “강남 시니어 대부분 임대수입 등이 있어 먹고살 만하다”며 “하지만 대부분 지하철로 이동하고 1만원 내외로 점심을 해결할 정도로 아끼며 산다”고 말했다. 강남 할머니라고 돈 마구 쓰는 줄 알면 착각이라는 거다. 그는 “우리는 돈 무서운 줄 아는 세대라 함부로 쓰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들은 또 강남 사람, 특히 복부인이 주름잡던 198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한 지금의 시니어를 다 싸잡아 부동산 투기꾼으로 비난하는 사회 분위기에도 불만이 많았다. 부동산 투자를 안 한 사람은 물론이요, 한 사람조차 그게 욕 먹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다.

 이필성(69·역삼동)씨는 “강남 시니어가 지금 이렇게 여유 있게 사는 건 젊을 때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라며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 시각으로 돌아보면 좋은 일 아니라 나쁜 짓도 했고, 누구는 땅 투기도 했다”며 “하지만 그때는 땅 투기든 뭐든 열심히 해서 돈을 벌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걸 비난하는 건 그렇게 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사람의 핑계일 뿐”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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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도 높은 교육열

 강남 시니어는 대체로 바쁘다. 오래된 정기 모임이 많고 모임이 없을 땐 뭔가 배우느라 열중한다. 특히 어학 공부에 열심이다. 강북 시니어에 비해 해외여행 기회가 많을뿐더러 손주 영어공부를 봐주는 경우도 많아 어학에 대한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여러 언어를 동시에 배우는 사람도 꽤 있다. 공근택(68·삼성동)씨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영어뿐 아니라 일어·중국어를 동시에 배운다”고 말했다.

 실제로 강남과 강북의 복지관 인기강좌를 살펴보면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강남 지역 복지관에서는 어학 강좌가 가장 먼저 마감된다. 하지만 강북 지역은 노래와 체조 등 신체활동을 하는 강좌가 더 빨리 마감된다.

 강남의 한 사회복지사는 “강남 시니어는 젊은층과의 소통에 관심이 많아 어학이나 정보기술(IT) 강좌에 사람이 많이 몰린다”고 말했다. 그는 “강북 시니어가 노래 배우기나 에어로빅 등 다양한 신체활동을 하면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면 강남 시니어는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것 자체를 즐긴다”며 “이게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최성규 강남노인종합복지관 과장도 “강남 시니어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고 말했다. 강남노인종합복지관은 강남구에서 가장 큰 복지관으로, 전체 등록인원 8000명에 하루 평균 수강인원은 1000명이 넘는다.

 강북의 또 다른 사회복지사는 “복지관 프로그램은 강남·북 상관없이 비슷하다”며 “그러나 강남에 어학 강좌 수가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노인복지관 인기강좌를 분석한 결과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 복지관 8곳 가운데 5곳의 최고 인기 강좌가 어학관련 강좌였다. 반면에 강북 지역 25개 복지관 중 어학 강좌가 1위인 곳은 용산노인종합복지관 등 2곳 뿐이었고, 나머지 복지관에서는 노래교실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강사 수준을 까다롭게 따지는 것도 강남 시니어만의 특징이다. 이지영 강남시니어플라자 사회복지사는 “다른 복지관에 비해 강사비 지출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이곳 시니어들은 강사 수준을 따져 묻고 질(質)이 조금만 떨어져도 교체하라는 압력을 행사하다 보니 자연히 신경 써서 좀 더 고급 강사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이곳 강사진은 대형 어학원 유명 강사와 대학 교수 등으로 구성돼 있다.

손주 학원 직접 고르는 수퍼 할머니 많아

 손주를 봐주는 할머니는 전부터 많이 있어왔다. 그러나 지금의 강남 시니어는 좀 다르다. 단순한 양육 차원을 넘어 손주 교육을 책임지는 사람이 많다.

 정모(71·여·청담동)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정씨 부부는 매달 들어오는 월세 수입이 1000만원쯤 돼 자식한테 큰소리치고 산다. 자식에게 얹혀 살거나 경제적으로 궁해서가 아니라 손녀를 제대로 교육시키려고 음악교사인 며느리를 대신해 손녀를 봐주고 있다. 키워주는 게 아니라 사교육을 담당하는 셈이다. 학원비 하라고 매달 100만원씩 보태주는 건 기본이다.

 정씨는 손녀가 어릴 때 영어학원에서 배우는 미국 교과서를 손녀랑 같이 읽었다.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갈 즈음 유명 수학학원을 탐문하며 고른 것도 정씨였다.

 정씨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 젊은 엄마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게 손주 사교육을 시킬 수 있는 건 젊은 시절 경험 덕분이다. 정씨는 전두환 정권 과외금지 시절 두 아들을 키웠다.

그는 “당시 아이를 학원 보내면 남편을잡아간다니 보낼 수 없었다”며 “하지만 내가 원래 교육열이 높다 보니 아들 중학교 때 같이 영어교과서를 달달 외우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미애 샤론 코칭&멘토링 대표는 “할머니가 손주 학원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은 대치동에선 흔하다”며 “자녀 교육을 성공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손주 교육까지 책임지는 할머니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자식에 이어 손주 교육까지 올인하는 경우 엄마가 아닌 할머니가 다 결정하고 책임진다”고 덧붙였다.

종교가 일상의 큰 비중인 경우도

 양재노인종합복지관의 시니어 기자단인 김양수(71·서초동)씨는 “삶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다”며 “봉사에 관심을 갖는 강남 시니어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보살핌을 받는 약자로서의 노인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인생 멘토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봉사활동은 다양한 장소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교회 등 종교단체 위주로 굴러가는 게 많다. 압구정동 경로당에서 만난 임광웅(67) 회장은 “성당에서 봉사하느라 시간 대부분을 쓴다”며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고 말했다.

 딸 셋을 둔 최모(71·여·압구정동)씨의 생활은 교회 중심으로 돌아간다. 최씨와 세 딸 모두 소망교회를 다녀 교회에서 자주 만나기도 한다.

 그는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소망교회 새벽기도를 간다. 이렇게 하루 시작을 소망교회에서 할 뿐만 아니라 주변 인간관계와 모임도 소망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최씨는 “주변에 나와 비슷한 패턴의 생활을 하는 가족이 많다”며 “교회에서 문화강좌와 금융특강까지 해줄 정도로 지역 노인의 관심사를 잘 아니 교회 때문이라도 압구정동을 떠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소망교회는 단순한 교회가 아니다”며 “신앙심이 깊지 않아도 이런 다채로운 강좌와 지역 모임이 소망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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