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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대 난동 속에 문화혁명의 종장|유혈로 번진 중공 권력투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모택동과 임표가 주도한 소위 「문화혁명」은 급기야 대유혈을 초래하여 남경·상해·북평 등지에서는 쌍방 간에 충돌이 계속 되고 있으며 사태는 바야흐로 내전 일보직전에 들어선 감이 있다.
당내 서열 제4위로 비약한 도주 부수상 겸 당 중앙선전 부장에 대한 『유·등 노선의 충실한 실행자』라는 중죄 낙인과 홍위대의 폭행, 주은래 규탄, 총공회 해산, 모부인 강청의 의외의 두각, 그리고 반모파의 끈길긴 저항을 증명하는 북평에서의 반모 벽보 출현과 남경에서의 양파의 유혈 충돌 등의 복잡한 사태는, 모·임 체제 확립을 위한 「문화대혁명」이 결코 주류파의 계획대로 순조로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것이다.
문제의 인물 도주는 2년 전만 해도 지방 간부의 한 사람에 불과했는데 문화혁명으로 4위의 지위로까지 약진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위 「부르좌」 실권파로 규탄되어 온 사람들은 대개 유소기가 주도한 노동 운동에서 자라고 30년대의 통일전선 공작에서 지식인층과 접촉한 유소기 국가주석과 인맥상의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도주의 경우는 유「그룹」에 소속시키기는 무리한 인상을 준다.
이렇게 보면 가장 주시되는 것은 역시 문화대혁명에서 약진하는 진백달이나 강청등 문화혁명소조 「그룹」과 도주와의 관계다. 당중앙 선전부장이 된 도주는 당내에 남아있는 소위 「실권파」 세력의 저항을 받아 문화혁명소조가 바라는「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보면 결국 도주 규탄은 당내에 유·등 노선을 추구하는 비주류의 세력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으며,「문혁」은 모의 정치 비서를 지낸 진백달과 모의 부인 강청 등「측근그룹」에 의해 진행될 것이며 앞으로 제2, 제3의 도주가 나올 수도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지난 6월 북평에 나붙은 주은래 규탄 벽보가 8일엔 제거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지지세력도 만만치 않음을 엿보이게 하는 동시, 사태 발전의 혼미상을 드러내고 냈다.
모가 58년 당6 중전회에서 『 자기뜻에 반해 국가 주석직을 빼앗기고 죽은 양친 같은 대우를 받아왔다.』는 홍위대 벽보가 사실이라면 비주류에의 거세설을 뒷밤침하고, 58년 이래 유·등 노선이 당·국가의 전권을 쥐어왔고 오늘에 와서 견디다 못한 모가 군을 배경한 임표 국방상 등 몇몇 심복과 함께 주도권 회복을 꾀해 전개한 것이 작년부터의 문화대혁명이다.
작년 12월 26일 유소기의 자아비판과 당서기관 인민일보의 「공·광업계에서도 문화대혁명을 하라.』는 외침과 함께 강청이 인민대회당에서 조직노동자 2천1백만을 옹하는 노동 운동의 총본산 전국 총공회를 비난, 연설했다.
다음날 27일 노동자의 새조직 「중화 전국홍색 노동자 연합회」에 의해 총공회와 기관지 공인일보사가 「실력관리」당한 사실은 유소기의 발판인 총공회의 사실상의 해체를 의미하며, 이는 유·등 비주류파의 거점에 대한 모·임 노선의 새로운 공격을 뜻한다.
팽진 체포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12월 공세에서 자신을 얻은 모·임 일파가 여세를 몰아 실권파가 장악하고 있는 생산 거점을 탈취한 것을 뜻하며 이를 계기로 노동자가 학생 홍위대와 「문혁」의 첨병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태는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총공회 비난과 그 실력관리, 유 자아비판, 팽진·나서경·주양 체포, 도주 규탄등 12월공세의 불길은 모두 강청 발언이 계기였다. 강청의 뜻밖의 대두와 실력은 커다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영국의 중공문제 전문가 「맥패릭·큐어」씨는 임표는 임시적 인계자고 강청 부인이 영구적인 후계자로까지 추단했다. 모 주석의 뜻을 당·군에 전하는 역할로 강청 대두를 설명하는 견해도 있으나 문화대혁명의 향방은 강청 부인 대두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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