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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위 출범 한달] 上. 경제정책 점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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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출범 한 달을 맞으면서 반환점을 돌았다. 그동안 인수위 활동을 정책 중심으로, 경제분야(기업.세제.금융 등)와 사회분야(노동.복지.교육 등)로 나눠 중간 점검한다.

인수위 출범 이후 수많은 정책이 쏟아졌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경기부양책은 쓰지 않는다'처럼 가닥이 잡혀가는 정책이 있지만 인수위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계속 헷갈리는 분야도 적지 않다. 현 정부와 인수위 간에 의견이 다른 것도 있고, 인수위원 간에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또 여소야대라는 국회 현실을 감안할 때 법 개정 자체가 불투명한 게 있고, 나라 살림 사정을 감안할 때 역부족인 것도 많다는 지적이다. 자칫 별다른 성과없이 소모전이 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장의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새 정부의 정책이 분명해질 때까지 투자를 유보하겠다는 기업이 적지 않고, 과천 관가에서는 "우리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외국인 투자자들이 새 정부의 정책을 궁금해한다"며 최근 한국을 찾기도 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DJ 정부가 5년 내내 개혁의 깃발을 내걸었는데 한국은 뭐가 잘못됐기에 아직도 개혁할 게 그렇게 많으냐고 묻는다"고 전했다.

자주 제기되는 문제는 인수위가 의욕이 앞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루려 한다는 점이다. 큰 줄기만 잡고 실천방안은 새 정부에 넘겨야 하는데, 그게 안되고 있다.

마치 공약집에서 뺄 것은 빼고, 추가할 것은 추가해 '공약집 개정증보판'을 만드는 느낌이라는 게 인수위 보고에 들어갔던 관료들의 반응이다.

국정과제의 선택과 집중이 안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정권도 이것을 못해 '성공한 인수위'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98년 DJ 정권의 인수위는 1백대 국정과제에 1천개에 가까운 실천과제를 의욕적으로 만들었으나 집권 말기에는 챙기는 사람조차 별로 없었다. YS 정권의 신경제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헷갈리는 정책=재벌 정책은 여전히 강도와 수위를 종잡기 어려운 실정이다. 인수위는 기업의 불안을 의식해서인지 점진적.자율적으로 개혁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총론은 부드럽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그게 아니어서 기업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다.

재벌개혁 쟁점 중 하나인 출자총액제한(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이 다른 회사에 순자산의 25% 이상 출자할 수 없는 제도)의 경우 인수위 내에서도 의견이 갈릴 정도다.

결국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한다는 모호한 선에서 일단락됐다.

정책을 쏟아놓다보니 앞뒤가 안맞는 경우도 있다.'경제자유구역 내 외국기업에 대해 규제를 대폭 풀겠다'는 발언이 있는가 하면,'외국기업에 특별한 인센티브를 줘 국내기업을 역차별할 생각은 없다'는 말도 나온다.

구조조정을 꾸준히 한다면서 공기업 민영화의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얘기도 있다.

특히 현 정부 각료들은 공기업 민영화를 계속 추진하기로 인수위와 합의했다고 밝히고 있어 혼선이 가중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전력의 발전 자회사인 남동발전의 입찰에는 10곳이 무더기로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시장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정책이 그야말로 아이디어 단계에서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다. 아파트를 다 지은 후 분양하는 '후(後)분양제'가 이런 경우다.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장에서 후분양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건설업체가 자금난에 몰릴 것이므로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대환 경제2분과 간사도 "아직 구체적인 시기.방법은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실행 여부가 불투명한 정책=법 개정이 만만치 않은 정책이 많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것이 국회에 계류 중인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다. 인수위는 다시 추진한다는 방침인데, "소송이 남발될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는 한나라당을 설득하는 게 선결 과제다.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도 연내 세법을 개정하기로 했지만 생각대로 될지는 불투명하다. 재경부 관계자는 "위헌 시비에 걸리지 않도록 개정안을 만들 예정이나 일부 조세전문가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법률적 검토 자체가 제대로 안된 것도 있다. 불공정 금융기관을 재벌로부터 강제로 떼어내는 금융기관 계열분리제나 2금융권 대주주 소유한도 등이 그런 것인데, 인수위는 일단 합동작업반을 만들어 시간을 갖고 검토를 더 해보겠다는 입장이다.

지방 발전을 위해 국세 일부를 지방세로 전환하자는 논의도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분석이다.

지금은 중앙 정부가 소득.법인세 등을 국세로 한꺼번에 거둔 뒤 각 지방에 나눠주고 있는데, 이를 지방세로 전환할 경우 소득이나 기업이 적은 지역은 세금이 안걷혀 지역별 '빈익빈 부익부'가 더 심해질 것으로 재경부는 보고 있다.

곳곳에서 '세금을 깎아주겠다'면서 '예산 지원은 늘리겠다'고 하니 과연 나라 살림의 수지를 맞출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기획예산처 관계자는 "예산을 아무리 원점에서 검토해도 공무원 인건비나 진행 중인 필수 사업 등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예산이 많기 때문에 정부가 실제 조정할 수 있는 예산은 전체의 10~20% 정도"라며 "인수위가 내놓는 사업을 다하려면 적자 재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가닥을 잡아가는 정책=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은 쓰지 않기로 하는 등 거시정책 기조는 비교적 빨리 교통정리가 됐다. 새 정부는 경제가 어려우면 재정을 조기에 푸는 재정정책에 의존하겠다는 방침이다.

DJ 정권 말기의 내수부양책이 가계 부실과 부동산 과열을 초래했다는 점을 피부로 느낀 결과로 보인다.

논란이 된 경제성장률도 공약인 7% 성장에서 한발 물러서 올해 일단 5%대로 낮춰잡았다. 성장률을 무리하게 올릴 방법이 없고, 또 올리려다 부작용만 커질 것이란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그 대신 임기 내에 고용을 늘리고 노사분쟁 비용을 줄여 7% 성장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가계대출을 급격히 줄일 경우 더 큰 부작용이 생길 수 있어 서서히 줄여간다는 입장도 분명해졌다.

한편으로는 개인워크아웃을 확대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방침도 정했다. 가계 부채의 근본적인 대책으로는 미흡하지만 '연착륙'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금융계는 안도하고 있다.

부동산 투기에 대해서도 확실한 입장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는 강력한 투기 단속을 하는 한편, 재산세.종합토지세 등 부동산 보유과세를 올리기로 했다.

이를 위해 과표를 현실화한다는 방침인데, 조세저항이 우려되는 만큼 단계적으로 올려간다는 복안이다. 다만 시.군.구 등 지자체 가운데 인상에 반대하는 곳이 많아 어느 정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고현곤.이상렬 기자 hkk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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