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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바둑계의 명승부사 김인왕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조남철 8단의 10년 아성을 무너뜨리고 66년 기회에 군림한 기린아, 제1기 왕위 김인 6단은 1943년생. 약관 23세의 청년이다.
『제 실력이 남보다 월등해서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진 않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한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이죠.』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새파란 나이에 비해 훨씬 의젓하고 은근한 겸손조로 말문을 열었다.
중대한 판국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승부사가 있을까. 누구나가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는 질문에 『그건 그렇겠지요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군요. 요는 정신적인 자세가 문제지요. 누구나 이겨야 한다는 목표는 한결 같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너무 긴장해서 승부에만 집착하다보면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합니다.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태란 그런 것을 말하는 거죠』-한마디 한마디를 마치 신중한 구상 끝에 맥점을 짚어 돌을 내려놓듯 했다.
『지나치게 상대를 의식하면 그것이 패인이 됩니다 반상무인 이란 말도 있지만요 그렇다고 방심한다든지, 정신무장이 해이된다든지 하면 또한 이길 수 없습니다. 우선 상대와 싸우기 전에 저 자신을 이겨야하니까요.』
그는 자신이 겪은 금년 한해를 『기억할만한 1년이었다』고 담담한 한마디로 요약했지만, 기단에선 『김인이 독주한 그의 해였다』고 입 모아 이른다.
지난 l월 제10기 국수전에서 9년 연패를 기록하고, 거의 모든「타이틀」을 독점했던 거장 조남철 8단에 도전하여 10년 아성을 뒤흔들어 깼을 때 많은 「팬」들은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석연치 않다는 듯 반신반의하는 태도였다. 어느새 그토록 성장했을까 하는 놀라움과 혹시 조8단이 「슬럼프」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의문에서였다.
그러나 몇 달 지난 5월에는 5강전에서 조8단은 불참했지만 강적들을 물리치고 전승을 거두어 지반을 굳혔다. 9월에 열린 중앙일보사주최 제1기 왕위전에서는 와신상담 설욕을 다짐하고 나선 조8단과 또 한판 격전을 치렀다. 조8단의 재기냐 김인 6단(당시 5단) 이제 1인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느냐로 기계의 화제는 들끓었다.
『그땐 역시 제가 크게 동요했던 것 같아요. 조 선생님의 바둑도 검토해 보고 제 딴엔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하느라고 했지만 시간까지 달리고 해서 무척 고전했죠. 승세에 놓인 막판에는 승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판 속에 심신이 송두리째 끌려 들어간 느낌이었어요. 정신이 없었죠. 대국 중에는 몰랐는데 판이 끝나니까 피로가 몰려오는데 감당할 수가 없더군요.』 제한시간 1분을 남긴 각박한 상황에서 장장 12시간에 걸친 지구전은 김6단의 쾌승으로 끝났고, 잇달아 같은 또래의 「라이벌」윤기현6단을 물리침으로써 제1기 왕위의 영예를 차지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 그는 아무도 의심할 여지 없는 제1인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는 점에 있다.
지난번 제11기 국수전에선 다시 도전자 윤6단을 3대0 「스트레이트」로 눌러 「타이틀」을 방어했다.
그의 현직은 군인이다.
좀더 자세히 캐보면 계급은 육군상등병. 국회연락장교단에 소속돼 있다. 군에 몸을 담고 있다는 구속감이 전연 없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고 있어 기사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고 했다.
가정에서는 5남매 중 4남. 흑석동에서 모친과 무역회사에 나가는 형과 함께 지내고 있다. 고향인 전남강진에는 부친과 가족들이 있고-.
기도에 뜻을 두고 상경한지 10년. 14세에 입단하여 일본 목곡 실9단 문하에서 수업한 2년간을 빼고는 줄곧 서울에서 살아왔다.
도전할 때와 도전을 받아야 할 수세에 서게된 현재의 처지가 어떻게 달라졌느냐는 물음에 『훨씬 더 무거운 부담을 느낍니다. 제 얘기가 크게 보도될 때마마 그건 더욱 가중됩니다.』
가장 무서운 상대는?
『특별히 누가 무섭다기보다 모두가 무서운 상대뿐인 걸요』-하관이 두둑한 얼굴에 소담스런 웃음을 담으면서 말했다.
취미는 가끔 당구를 치는 정도고 실력은 2백. 주량은 정종반되, 맥주5병쯤일 거라고 하지만 훨씬 줄잡은 에누리인 것을 짐작케 했다. 담배는 하루평균 파고다 반 갑인데 대국 때 밤을 새우다 보면 두 갑까지 태울 때가 있고, 냉수 다섯 되가 덧붙는다.
신장 1「미터」65, 체중은 요즈음 줄어서 58「킬로그램」쯤일 거라고. 젊은 나이와 자그마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왕위다운 무게가 육신에 그득히 침전해있고 교태라고는 볼 수 없는 겸손 속에도 승부에 거는 가슴속 깊이 간직한 투지의 불길을 느끼게 한다. 그는 정녕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기보다는 오랜 불길이 안으로 안으로 타오르는 모닥불과 같은 그런 보기 드문 승부사임이 분명하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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