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엔저' 미국 진짜 속내는…

중앙일보

입력

도쿄(東京)를 방문 중인 폴 오닐 미 재무장관이 22일 외신기자들이 몰려든 현장에서 잔뜩 짜증을 냈다. "나의 신조는 누가 말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의 카운터파트인 시오카와 마사주로(鹽川正十郞) 일 재무상을 겨냥한 말이었다. 아주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시오카와 재무상은 이날 오전 양국 재무장관 회담 후 기자들에게 "오닐 미 재무장관이 '환율은 시장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털어놨었다.

이 설명이 오닐 장관이 엔저를 용인했다는 식으로 시장에 전해지면서 엔화가치가 달러당 1백33엔대 후반으로 급락했다. 엔화가치는 23일에도 약세를 거듭해 한 때 1백34엔대에 들어서기도 했다.

◇ 오닐 장관의 의중은=지난해 9.11 테러가 터지던 날 그는 도쿄에 막 도착했다. 일본 경제 회생책에 대해 얘기해 볼 틈도 없이 바로 돌아서야 했다. 이번엔 아프가니스탄 자금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왔지만 사실 그건 국무장관 소관이었고 그에게 더 큰 이슈는 환율문제였다.

그는 22일 기자들에게 분명하게 말했다."환율을 인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보호주의다. 환율조정은 산더미처럼 쌓인 부실채권을 해결하거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오닐이 이처럼 강하게 나가자 미조구치 젠베이(溝口善兵衛) 일 재무성 국제국장은 23일 "미국이 엔저를 용인한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실이 아니다"고 해명하고 말았다.

환율문제는 오닐이 1년 전 취임할 당시부터 민감한 사안이었다. 미국 재계는 경영인(세계 최대 알루미늄 제조업체 알코아사) 출신인 오닐이 재무장관이 되자 그가 기업들을 위해 '강한 달러'정책을 바꿀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 재계는 계속해 같은 압력을 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닐은 재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환율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 오닐 의도 시장엔 안먹혀=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엔화를 일부러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경제 펀더멘털(기초여건)이 악화함에 따라 통화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그냥 놔두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반면 외환시장과 중국 등 주변국들은 일본 정부가 자국 기업의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는 그동안 시장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돼 왔다.

시장에서는 오닐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엔저를 용인했거나 적어도 강한 반대는 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23일 엔화가 속락한 것이 이걸 말해준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서울=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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