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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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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김현승

시는 또 하나의 기도다. 종교적 절대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국에게, 대자연에게, 나에게. 시는 끝없는 기도의 언어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시인은 누구나 기도자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시인의 기도는 오래도록 가난한 영혼들에게 달디단 샘물을 퍼주고 있다.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로 시작하는 이 '가을의 기도' 한 편 만으로도 우리는 어떻게 써야 기도가 시가 되는가를, 왜 시는 기도이어야 하는가를 알아듣게 된다. 수정처럼 투명한 언어로 육신이 아닌 영혼의 이슬을 빚어내는 시인 다형을 처음 뵌 것은 1960년 봄 미당 서정주 선생 댁에서였다.

공덕동 미당 선생을 뵈러 갔을 때 낯선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필시 문인일 듯싶은데 명동이나 어디에서도 만났거나 책에서도 본 일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분은 창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미당과 이야기하는 모습이 여느 사이인 것 같지가 않은데 아무리 머리를 회전시켜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근배야 인사 드려라. 김현승 선생이시다." 미당의 말씀을 듣고서야 머리 숙여 인사드렸는데 그때 다형은 광주의 조선대학교 교수로 계시다가 모교인 숭실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서울로 오신 첫걸음이었던 것을 뒤에야 알았다.

64년 동아일보에 내 시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가 한국일보 당선과 중복되었다하여 취소되었을 때 심사위원의 한분이었던 것 말고는 학연.지연 어느 것도 걸친 것이 없었는데 67년 무렵부터 주말이면 나는 수색에 있는 다형댁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색에는 다형 말고도 이동주.최미나 부부문인과 김종해 시인이 살고 있었고 그 건너 난지도에는 박봉우, 모래내에는 이성부, 나는 응암동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다형댁은 광주에서부터 다형을 따르던 조태일 등과 다형이 심사해서 당선한 이탄 등 문학동네 식구들로 주말이면 붐볐다.

다형은 평양에서 태어났으나 목사인 부친을 따라 광주에서 소학교를 다니고 평양 숭실중학.숭실대학을 다녔다. 숭실대 1학년 때 55행의 장시를 써서 교지에 투고했더니 양주동 교수가 불러서 교지에 싣기는 아까우니 중앙지에 보내자고 했다.

2학년 봄. 동아일보에 두 편의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아름다운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가 게재돼 화려하게 시인으로 등극한다.

아버지가 목사였던 터라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며 남다른 신앙심을 키워왔고 37년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 신사참배 거부로 번져 광주경찰서에서 사상범으로 물고문을 당하기도 한다. 몸에 밴 기독교적 생활 자세로 술과 담배를 안하는 까닭에 다형(茶兄)이라는 아호가 말하듯 오직 커피 사랑만 지극했었다.

요즘처럼 세계의 커피가 안방까지 차지했으면 오죽 좋았을까마는 60년대의 다방 커피는 담배꽁초.계란 껍질을 넣고 삶기도 하는 등 제맛 내는 다방이 없었다.

커피 맛의 1급 감별사인 다형은 '귀거래''맘모스'등 시내의 두세 군데 다방만 출입한다. 집에서는 머리맡에 코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전기화로를 켜놓고 주전자에 물을 끓여 커피를 손수 걸러주는 것이 최상의 손님 접대였다.

그 다형에게 우리 '악동'들이 모여 화투 '섰다'를 가르쳐드렸다. 담배값 정도의 내기 화투였지만 낚시나 등산 같은 취미도 없었던 터라 다형댁에서 혹은 이동주 시인댁에서 주말이면 모여 화투놀이를 했었다.

71년 장충동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통령 자리를 놓고 한 판 붙던 날은 그 연설 들으러 갔다가 홍은동 산동네 내가 사는 오두막에도 오셔서 놀다 가시기도 했다.

시를 쓴다는 것 만으로 후배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시던 커피 매니어 다형은 75년 커피잔을 놓고 가셨다. 지금 겨울 광주 무등산 오르는 길에는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는 시'눈물'이 새겨진 다형시비가 눈발을 맞고 서 있을 것이다.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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