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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서소문 포럼

김정일 평화통일 원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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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강영진
논설위원

김정일이 남겼다는 유서가 국내에 공개된 적이 있다. 탈북자 출신으로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를 운영하는 이윤걸씨가 1년여 동안 노력한 끝에 지난해 초 입수했다는 문서다. 이씨는 이 문서를 토대로 여러 차례 세미나도 개최했고 지난해 11월에는 『김정일의 유서와 김정은의 미래』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유서 내용을 두 차례 보도한 바 있다. [2012년 4월 13일자 12면, 2013년 1월 29일자 7면]

 이윤걸씨에 따르면 유서가 작성된 시점은 김정일이 사망하기 1년2개월 전인 2010년 10월께라고 한다. 김정일이 직접 자신의 딸 김설송에게 구술해 작성했고 맨 처음 동생 김경희에게 내용을 알렸으며 후계자 김정은을 포함한 소수 지도부에 공개한 것은 1년가량 지난 2011년 10월 8일이었다는 것이다. 김정일 유서가 ‘10월 8일 문서’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배경이다.

 이씨가 공개한 유서는 모두 44개 항목으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런데 원문은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다고 한다. 이씨가 편의상 문장 또는 단락별로 번호를 매겼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원문과 공개한 문건의 내용과 순서는 동일하다고 이씨는 밝혔다.

 유서가 공개된 이후 진위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꽤 있었다. 북한으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과연 김정일이 극비리에 남긴 유서를 통째로 입수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세종연구소 정성장 수석연구위원은 유서가 진짜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 박사는 44개 항목으로 된 내용들이 가짜로 지어내기에 어려운 성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자신이 이 문서를 접한 직후에 열린 북한 노동당 제4차 당표자회(지난해 4월 12일)에서 유서에 나온 대로 주요 결정들이 채택됐다면서 “이윤걸 대표가 입수한 다른 정보들도 신뢰도가 높다”고 덧붙였다. 통일연구원의 전현준·정영태 선임연구위원도 유서의 신뢰도를 비교적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반면 정보 당국자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한 관계자는 “이 대표가 입수해 온 정보들의 신뢰도는 반반”이라고 낮게 평가했고, 유서의 진위에 대해서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 대표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당국자는 “논란이 많았지만 확인 작업 끝에 유서가 사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유서의 진위를 따져보는 이유는 유서에 담긴 북한의 대남정책이 흥미롭기 때문이다(44개 중 8개 항목). 최근 북한이 긴장을 고조시키는 배경과 관련해 시사하는 점이 있다. 참고로 유서가 가짜라는 의견을 지닌 전문가들조차 대체로 ‘내용이 꽤 그럴듯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 그들(남한)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상태에서 경제, 문화교류를 시작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전쟁을 통한 통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중략) 남조선과 손을 잡고 함께 발전해야 한다. 이 길만이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다.” “조선반도의 안정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군사적 위력이 결정적임을 남조선 당국자들에게 인식시키고 그들과 힘을 모아 경제발전을 해나가는 것이 내가 늘 추구해왔던 전략이었다.”

 요지는 평화통일을 해야 하고 남한을 군사적으로 압도한 상태에서 남한의 힘을 빌려 경제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김정일의 유언이라고 해도 김정은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르진 않을 것이다. 반면 함부로 묵살하기도 어렵다. ‘김정일의 후계자’라는 점이 김정은이 가진 권력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기자는 유서의 진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상태다. 그렇지만 그 내용들은 곰곰 씹어보고 있다. ‘군사적으로 우리를 제압한다고… 핵무기만 가지고 그게 될까… 김정일이 정말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고 김정은도 같은 생각이라면… 뭔가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좋은 묘안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지금처럼 험악한 분위기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북한은 계속되는 긴장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지는 않을까….’

강 영 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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