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1)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유홍열)|최초의 신부 김대건(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근대학문체득한 훌륭한 양반자손>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었으며 멀리 해외(마카오)에 유학하여 신학과 철학은 물론역사 지리 외국어등 근대학문을 일찍이 체득하고 외국과의 문호개방을 주장한 선각이있다. 그는 경상도 김해에 본관을 둔 김제준의 둘째아들(어머니는 장흥고씨)로 1821년 8월에 충청도내포(당진군우강면신종리)에서 태어났다. 제준의 조부 진후는 조선교회 창설기부터 입교하여 10여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순사하였으며 그 후손들 또한 신앙을 굳게 지키었다. 따라서 거듭되는 박해로 인하여 훌륭한 양반가문과 넉넉한 가산은 점점 무너지게되고 제준은 마침내 경기도용인땅의 곰배마실(한덕동)로 피난갔다.

<불인신부에 뽑혀 「마카오」에 파유
그곳 일대는 깊은 두메사골로 교우들이 박해를 피하여 화전생활로 겨우 사아가던 곳이었다. 대건의 집안은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민첩하고 신심이 굳었다.
이무렵 우리나라에는 불인신부 모방 (나)이 몰래 입국하여 포교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본국인출신의 신부양성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먼저 최방제(교명 방지거)와 최양업(도마)을 뽑아 기르던 중 1836년6월에 한재골 일대르 전교하다가 우연히 대건(16세)을 발견하고는 한눈에 그 영특함을 간파하였다. 서울로 불러 올리어 상기 두소년과 함께 가르친 후 그해 연말에는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신부에게 붙여 멀리 「마카오」로 보내었다.

<두차례의 민란에 「마닐라」피난도>
당시 조선교구의 포교를 맡고 있던 파리외방전도 「마카오」지부에서는 고국을 떠난 지 7개월만에 갖은 고초를 겪고 만리이역까지 찾아온 이 세소년의 열성에 감격하여 부근의 신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그들슬하에 두어 직접 가르치었다. 세소년 또한 실심으로 연학에 힘써 수년동안에 신학과 나전어를 비롯하여 세계의 지리 역사와 불어등 근대학문에 깊은 조예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불행은 없지않았으니 그동안 두차례나 민랄으로 인하여 「마닐라」로 피난가야하였고, 1838년에는 동학 최방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그지 얺는 슬픔에 잠기기도 하였다.

<불제독통역으로 귀국의 길에 올라>
1842년에 영국이 이른바 아편전쟁에 이겨 중국으로부터 많은 이권을 획득하자 불란서도 이에 뒤지지 않으려고 「세실」(Cecil) 제독으로하여금 2척의 군함을 이끌고 동양으로 나가게 하였다. 「세실」은 「마카오」의 전교지부에 들러 조선어통역생을 구하였다. 전교지부와 대건등은 이 기회에 무사히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할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이를 응낙하였다. 이리하여 동년2월, 대건은 외인제독의 통역관으로 귀국의 장도에 올라 도중남경에 이르 러「세실」과 함께 영국이 남경조약을 체결하는 자리에 참석하였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