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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교회재거의 중추 정하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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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하상은 전후 아홉 번이나 북경을 드나들어 끝내 성직자를 영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한때 위태로웠던 조선교회를 재건한 중추이며 문호개방에 힘쓴 선각이었다. 그는 정약종의 둘째아들로 1795년에 경기도양근 땅의마재(馬峴)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유한의 딸이었다. 그의 선대는 훌륭한 남인 집안이었고 그의 아버지 형제들은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천주교를 신봉한 학자들로서 이름높았다. 즉 사학(천주교) 죄인으로 몰리어 오랫동안 귀양살이 하면서 「자산어보」를 지은 약전은 그의 중부이었고 많은 저술로써 실학을 집대성한 약용은 숙부이었으며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고숙이었고 백서를 몰래지은 황사영은 사촌자형이었다.

<훌륭한 남인집안 약종의 둘째아들>
더우기 아버지 고종은 가장 열렬한 신도로 초대 명례회 회장이었고 교리연구에 힘써 국문으로된 「주교요지」를 지어내었다. 그러므로 약종은 1801년의 대박해가 일어나자 먼저 잡히어 서소문 밖에서 목을 잘리었고 큰아들 철상도 함께 처형되었다. 하지만 부인 유씨는 남편의 굳고 참된 신심에 크게 감동된 바 있어 신심을 꿋꿋이 지키었다. 가산을 모두 빼앗겼으므로 하는 수 없이 때에 일곱 살 밖에 안된 하상등 가족을 거느리고 마재의 형제댁으로 찾아가 의지하였다.
그러나 시가의 친척들은 천주교로 말미암아 크나큰 화난을 입었고 더우기 약전과 약용이 귀양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반겨줄 리가 없었다.

<결혼권유 물리쳐 서울서 교인수행>
갖은 고생과 모멸을 받는 중에서도 이미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은 하상은 오직 어머니가 들려주는 가르침을 받들고 주위에서 종교생활을 그만 두도록 유혹함을 한결같이 물리쳤다. 그는 자람에 따라 곧은 성품과 뛰어난 재주와 건장한 체구와 강한 정력을 겸비하였다. 따라서 그를 사위로 맞아들이려는 사람도 많았으나 그는 서울로 올라가 교우의 집에 몸을 붙이어 교인으로서의 수행을 닦았다. 1813년에는 겨우 20세의 어린 나이로 함경북도무산에서 귀양살이하던 조동섬(섬)이란 유명한 교우를 찾아갔다.

<동지사 통역관의 노복으로 북경에>
여러달 동안 머무르면서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교회의 발전책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급무는 목자(신부)를 맞아들이는 일이고 그 일은 그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깨닫게 되었다.
서울에 돌아온 후 동지들로부터 절대적인 찬성을 얻어 그 실행을 위한 준비에 힘썼다. 1816년 10월에는 북경으로 떠난 동지사 일행의 통역관의 한 노복으로서 심한 고통을 달게 이겨내고 북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곧 북경주교(실은 남경주교)를 찾아가 성사를 받는 동시에 신부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박해가 심하여 하상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신부의 도중병사 실행 못했던 영입>
그는 하염없이 기대에 어그러짐을 슬퍼하였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익년 이후 계속 동지사 일행의 노복으로서 꾸준히 북경에 드나들면서 신부영입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825년초에는 유진길 이여진 등 열심한 교우와 더불어 북경에 들어가 연서로써 「로마」교황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교회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하루빨리 신부를 보내주도록 간청하였다.
이어 익년 말에는 북경교회로부터 신부를 보내주리라는 약속을 받기까지 하였으나 조선으로 떠난 「심」(Sim)신부가 중도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유홍렬【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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