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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동·서 교양 아우른 영원한 문학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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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번역가로,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독보적으로 해석한 한학자이자 서예가로 살아온 김구용(金丘庸.본명 金永卓) 선생.

그는 4~5년 전 노환을 앓게 된 뒤 곡기를 끊고, 아무에게나 귀와 입을 열어주지 않으려는 듯 막걸리로만 살아가다 지난 28일 79세를 일기로 숨졌다.

빈소인 삼성서울병원에는 이원섭.어효선.성춘복.정진규.허영자.박제천.이가림.감태준.김사인씨 등 문인 2백여명이 찾아와 고인을 추모했다.

제자인 성균관대 강우식(국문학) 교수는 "선생님은 자신을 내세우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며 "성공을 추구하는 것만 문학이 아님을 당신은 삶의 자세로 일깨워주셨다"며 애도했다.

192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부모 곁에 있으면 제 명대로 살지 못한다 하여 네살 되던 해 금강산 마하연에 들어가 불교와 한학을 접했다. 40년부터 62년까지는 충남 공주 동학사에 기거하며 경전 및 동서 고전을 섭렵, 번역하며 시를 썼다. 이후 87년까지 성균관대 교수를 지냈다.

고인은 시(詩) .서(書) .화(畵) 에 두루 능했지만 끝내 시인으로 남길 원했다. 49년 '산중야(山中夜) '로 등단한 그는 "감상의 미는 여백마저 없애버리는 사치에 지나지 않으며 엄격한 생각으로 허영을 버릴 때 시는 한 사람의 독자를 얻는다"는 엄결한 자세로 시 쓰기를 일관했다.

평단에서는 "초현실주의를 수용한 그의 시는 동서양의 정신적 차별은 물론 주객의 구분조차 없앤 근원적 자유를 향한 몸부림으로 가득차 있다"고 평가한다.

고인은 『시집(詩集) .1』 『詩』 『九曲』 『송백팔(頌百八』 등 네권의 시집을 남겼다. 그렇다고 정신의 엄격함만을 고수한 원칙주의자는 아니었다. 우리네 삶에서 웃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동료와 후배, 제자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동학사에서 학승에게 강의하던 어느 봄날 선방 앞에 만발한 복사꽃에 눈물 겨워, 누운 채 경전을 읽다 주지스님에게 들켰다. 그 때 스님이 "어찌 무엄하게 누워서 읽느냐"고 핀잔을 주자 고인은 "어떻게 경전을 내려다 볼 수 있느냐"고 응수했다고 한다. 고인은 뛰어난 번역가이기도 했다. 원전을 하나하나 꼼꼼히 대조해가며 번역한 『채근담』 『옥루몽』 『삼국지』 『수호전』 『열국지』 등은 번역문학사에서 넘볼 수 없는 거봉으로 자리하고 있다. 번역에 정통한 소설가 이윤기씨는 "김구용 선생의 의고체 擬古體) 번역 문장은 아름다움의 극치다.'짧은 문장에도 이렇게 깊고 은근한 뜻을 담을 수 있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고인은 평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간행된 『김구용문학전집』 가운데 한권인 9백여쪽짜리 일기에는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 등 신산스런 역사의 굴곡을 문학으로 이겨내려 했던 그의 치열한 정신이 눈물겹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김구.이시영.정인보.김동리.변영로.박종화 선생을 비롯해 고승(高僧) 대덕과 교우한 일화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 정신사를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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