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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9·28을 맞을 때마다 수도 탈환에 선봉 섰던 해병들의 모습이 되 살아나고, 석 달만에 다시 꽂은 중앙청 옥상의 태극기가 새로이 고마워진다.
그러나 회고의 시선을 중앙청 꼭대기에서 인천 앞 바다로 돌리면 9·28을 가져다 준 「맥아더」장군을 생각케 된다. 그리고 한 뛰어난 지도자의 품격과 용기를 생각케 된다. 「맥」원수는 사관생도 때부터 특출한 인물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내리 1등만 하는 초 우등생이었을 뿐 아니라 「데이트」의 명수이기도 했다. 또 임관 후엔 가장 나이 어린 육사 교장에, 다시 가장 소년한 참모총장이었다.
육군의 복장 규정이 그를 속박할 수 없었다. 구 유명한 「파이프」와 함께 「맥」장군과 기나긴 군역을 같이한 화사하게 수놓은 그의 군모는 기실 미육군의 것이 아니라 비율빈 육군의 장군모였다. 이러한 몇 가지만 가지고도 명장 또는 기장으로서의 「맥」장군의 면모를 족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지도자가 걷는 길을 완전히 뒤집고도 큰 공을 세운데서 그의 파격적인 장군됨을 볼 수 있다. 부하들의 말을 잘 듣고 독단을 피하고 명령하기 보다는 설득을 통해서 만사를 처리해 나가는 것이 보통 유능한 지도자로 되어있다. 근대전의 군사명관은 일종의 위원회의장과 같은 구실을 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천 상륙 작전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맥」장군은 여러 달 동안 참모들의 반대 의견을 잠자코 들었다. 예정된 날짜와 시간에, 인천에 대군을 올리겠다는 「맥」장군의 의견에 대한 반대 이유가 정연하게 개진되었다. 본국의 합참의장이 「맥」장군의 계획을 만류하기 위해서 동경으로 날아오기까지 했다.「맥」장군이 아니었다면 인천상륙작전도 9·28도 무가망이었을 것.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 가서 내린 「맥」장군의 단안은 이랬다. 왈 『제관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적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예정대로 인천에 올라간다.』 9·28의 수훈자는 명장 수장에 차원 높은 지장이던 「맥」원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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