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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잘하면 거리응원 질서 맡는 경찰도 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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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경찰해오름야구단의 구단주인 김해경(54) 서울강동경찰서장이 23일 도시철도공사 사장기 ‘스마트리그’ 개막전에서 시구(왼쪽 사진)를 하고 있다. 경찰해오름 야구단 선수들이 개막경기에서 승리한 뒤 “파이팅”을 외치며 WBC에 출전하는 한국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했다. [김경빈 기자]

23일 오전 10시 서울 고덕동 차량기지사업소 운동장. 서울 시내 35개 아마추어 야구팀(지역 연고 팀, 관공서 팀이 주축)이 참가하는 도시철도공사 사장기 쟁탈 ‘스마트리그’ 개막전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장내에 “시구가 있겠습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야구 유니폼을 제대로 갖춰 입은 중년 여성 한 명이 마운드로 올라섰다. 투수 글러브를 끼고 야구공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와인드업을 한 뒤 타석을 향해 공을 뿌렸다. 주심이 “스트라이크”라고 외치며 오른팔을 힘차게 들어 올리자 경기장 주변에 몰려 있던 30여 명이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경찰해오름야구단 구단주 김해경 서장

 시구자는 김해경(54) 서울강동경찰서장. 2002년 강동서 근무 경력이 있는 현직 경찰관들만으로 창단된 ‘해오름 야구단’의 첫 여성 구단주다. 개막전은 해오름야구단과 서울 관악구청 위너스의 대결. 직업 특성상 인사이동으로 경기도에서 근무하게 된 팀원은 1시간이 넘는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왔다. 당직 근무를 서고 퇴근하자마자 곧장 나온 팀원도 있었다. 피곤할 법도 한데 이들의 눈에는 결기가 보였다. 지난해 10월 전·후기 통합 결승전에서 노원 지역 팀에 5대 6으로 역전패하며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한 기억 때문이라고 했다. 김 구단주의 시구가 힘이 됐는지 첫 경기는 11대 4로 가뿐히 이겼다. 해오름야구단은 스마트리그에서 최근 4년간 우승 2회·준우승 1회를 차지한 리그 최강자다.

 하지만 처음부터 강팀은 아니었다. 11년 전 창단 직후 척박한 공터에 가까웠던 운동장을 직접 ‘야구장’으로 개조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전봇대를 설치한 뒤 사다리차에 올라 손수 그물을 쳤고,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전광판을 걸자 그럴싸한 야구장이 완성됐다. 이른바 ‘선출’(중·고등학교 선수 출신) 한 명 없이 시작한 첫해 성적은 1승 11패. 5회에 이미 상대팀과 10점 이상 차이가 나는 ‘콜드게임’도 여러 번 당했다. 체력 단련과 스트레스 해소가 주목적이라지만 매번 지는 바람에 맥이 빠졌다고 한다. 이후 경찰의 자존심을 걸고 악바리같이 연습했다.

첫 시즌을 마친 뒤 서울 길동초등학교, 양천중학교 등 야구부가 있는 학교의 양해를 얻어 연습에 동참하며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다시 밟았다. 이도훈(41) 경사는 당시 연습하다가 코치가 친 공에 왼쪽 눈을 맞는 부상도 당했다. 시퍼렇게 멍이 든 게 판다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팬돌이’다. 강신필(44) 경사는 해오름야구단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2004년 제주도에서 열린 전국공무원야구대회에서 투수가 던진 공을 얼굴에 그대로 맞고도 출루했고, 이후 경기를 주도해 승리할 수 있었다. 11년째 감독을 맡고 있는 신건우(43) 경위는 “당시 피할 수 있는 공이었는데 이를 악물고 맞는 모습이 벤치에서도 보였다”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동안 쌓인 건 우승 트로피만이 아니다. 강동서는 최근 5년 동안 서울 31개 경찰서 가운데 유일하게 의무위반사고(음주 등 민간인에 대한 물의 사고)가 단 한 건도 없었다. 김해경 서장은 “해오름야구단이 본보기가 되면서 경찰서 내 다른 운동 모임들도 활성화됐다”며 “이를 통해 경찰들이 업무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해소할 수 있게 된 덕분인 것 같다”고 자평했다.

 다음 달 2일 개막하는 제3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김해경 서장은 “이번 WBC 야구대회에서 선수들이 선전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때 이상의 감동을 나누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하나 되는 장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종선(39) 경위는 “WBC 대표팀이 선전하면 경기가 진행되는 시간만큼은 112 신고도 줄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또 “본선에 진출해 시민들이 길거리 응원에 나선다면 경찰이 현장 안전 유지를 위해 할 일이 늘겠지만 이조차 신명 나는 일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글=정종문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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