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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쑥국, 봄동 배추 큰개불알풀꽃 봄을 맛보고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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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우리나라 국토가 아주 좁다고 평소 생각해 왔다. 남북으로 길다지만 그나마 반쪽으로 갈라진 처지다. 지난 금요일 저녁 승용차로 경남 통영으로 달려가 하루 잤다. 그나마 서울을 빠져나가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먼저 와 있던 지인들과 함께 토요일 한나절을 통영에서 보내고 배편으로 사량도(통영시 사량면)에 들어갔다.

 내가 사는 경기도 파주시는 요즘도 온통 눈밭이다. 먼저 내려 얼어붙은 위로 또 눈이 내려 언제쯤 흙바닥을 드러낼지 감이 안 잡힌다. 통영은 달랐다. 동피랑 마을을 구경한 뒤 들른 남망산 공원은 봄이 움튼 지 오래였다. 잔설(殘雪)조차 떠나고 없었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초정 김상옥(1920~2004) 시인의 시(‘봉선화’)가 새겨진 시비 주변엔 이름도 힘찬 큰개불알풀들이 한창 꽃망울을 터뜨려대고 있었다.

 사량도의 봄은 한적했다. 한국 100대 명산으로 꼽히는 지리산과 불모산·옥녀봉을 찾는 등산객들만 간간이 눈에 띄었다. 하늘빛을 닮아 그런지 바다가 유난히 파랬다. 달고 감칠맛 나는 봄동 배추와 노지 시금치, 냉이, 풋마늘. 볼락과 노래미도 상에 올랐으니 소주가 빠질 수 없었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 했다. 도다리쑥국은 누가 조리법을 배워 수도권에 식당을 차리면(이미 있겠지만) 꽤 잘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렸다. 그러나 입춘을 맞은 지 벌써 2주일이 넘은 데다 어제는 대동강도 풀린다는 우수(雨水). 누구도 변화를 거스르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여름엔 덥다고 얼마나 난리였던가. 폭염특보가 20일 넘게 이어졌고, 무더위로 숨진 사람만 10명이 넘는다. 추위가 찾아오자 뜨거웠던 기억도 함께 밀려났을 뿐이다.

 봄을 미리 만나고 온 느낌이었다. 일요일, 고속도로를 타고 귀가하는데 대전을 지나자 간간이 눈 쌓인 풍경들이 눈에 띄었다. 서울에 들어서니 큰길 주변도 아직 눈투성이고 파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계절감이 이리 뚜렷하니 생각처럼 좁은 국토는 아니다. 하나 그래 봐야 며칠 차이다. 어제 출근 채비를 하면서 지난 강추위 때 입기 시작한 내복을 처음으로 벗어던졌다. 바지 안 맨살을 살랑살랑 파고드는 늦겨울, 아니 초봄의 냉기가 사뭇 상쾌했다.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 벌판을 뒤흔드는 /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르네 / 스커트 자락의 상쾌!’ 황인숙 시인의 시(‘바람 부는 날이면’)가 묘사한 치마 입은 여자들의 즐거움이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여하튼 이제 시간은 봄의 편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불쑥 쳐들어오는 게 어디 계절뿐이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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