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을 속이는 그림들|광학적인 부조리…세련된 감각의 교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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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비스러운 승려들이 어리둥절한 예식을 하고 있다. 끊임없이 그들은 사원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부는 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아마 영원히 계속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원계단은 비록 45개밖에 안되지만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니 말이다.
승려·사원 그리고 계단은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니다. 다만 하나의 그림이 이들을 만들었을 뿐이다. 한강의 그림판-「네덜란드」의 재가며「아마추어」사학자인「마우리츠·시·에셔」의 석판인쇄-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재래의 세계상에서 혼동을 가져오게 했다.『눈이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고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해도 해답을 결코 풀 수는 없다』는 것이다.『왜냐하면 거기는 실제로 아무 것도 없으니까』라고 미국의 심리학자「R·L·그레고리」박사는 말한다.
이 그림의 신비성은 세련된(교묘한) 감각의 교란이다.「에셔」는 50년 동안 그린 종류의 광학적인 부조리를 구성하고 연구해왔다. 요즘 와서 다시 이런 그림들이 미국의「뉴요크」와 같은 지성적 잡지의 만화 난을 통하여 등장하고 또한 수학자나 심리학자들에 의해서도 제도상으로 하등 잘못이 없는 기하학적 그림,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런 눈을 어지럽히는 종류의 그림들이 연구되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우리 눈을 속이는 유명한 간단한 그림이 있다. 즉 그림(B)와 같이 양끝이 화살표 끝으로 막혀진 선은 사실은 길이가 갈지만 화살표가 안으로 열려진 선이 밖으로 열려진 선보다 짧게 보인다. 또 그림(A)와 같이 평행한 두 직선 만일 이 선들 위에 물고기 뼈 모양, 서로 방향이 다른 평행선들을 그림과 같이 그렸을 때 평행선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착각에 대한「그레고리」박사의 설명은 이제까지처럼 주목되어오지 않던 1637년 불란서의 철학자 및 사학자인「데카르트」가 기술한바 있는 소위 크기 불변(크기일정)이란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 물체가 관측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우리 눈의 망막에는 작은 상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측자로부터 20「미터」떨어져 있는 사람이 망막에 나타난 작은 상에 의해 난쟁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 뇌의 시각 감지 중추는 경험에 의해서 망막에 생긴 상들을 꾸준히 고정한다. 눈의 인상(느낌)을 끊임없이 경험에 일치(또는 조화)시키려는 이러한 노력이 또한 사람들이 종이 위에 제도된 그림을 볼 때도 작용하는 것이다.
종이 위의 그림은 평면적인 2차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감지신경은 이곳 위에 3차원적인 것을 더해서 환상하려 애쓴다. 전래의 시각운동(착각)은 즉 뇌가 구별할 능력이 없는 두 가지의 광신호가 뇌에 전달됐을 때 일어난다. 예를 들면 고기뼈 모양의 사선을 가진 두 평행선(그림A)에서 사선들만 살펴보면 이 그림은 원근을 구별할 수 있는「깊은」(부피)감을 수는 시범신호를 뇌에 준다. 그런데 그 평행선은 다만 2차원적인 상을 나타낼 뿐이다.
이들 소위 아연케 하는「불가능한 그림」(전문용어는 그렇게 부름)을 살펴보면 각축이 서로 비스듬히 붙은 삼각형 각재(그림D)는 이 그림을 공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려는 뇌의 노력을 무참히 좌절시키는 것이다. 미국의 풍자잡지인 MAD(매드·광)잡지가 무의 속표지를 꾸몄던 그림인 그림(F)는 더욱 우리를 혼동시킨다.
왼편은 U자형의 각재인데 오른편에서 보면 3개의 원주이니 우리의 판단을 혼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에셔」의 중(승려)과 계단도 무척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이다. 영원한 계단 위의 방황자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다만 종이위 평면에서 여행중인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공간적인 착각은 충분한 것이다. <서독함부르크 문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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