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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올림픽 빛낸 합창단 ‘오! 싱어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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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달 29일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개막식에서 ‘오! 싱어즈’가 가수 이적(앞줄 왼쪽)과 함께 올림픽 주제곡인 ‘투게더 위 캔’을 부르고 있다. ‘오! 싱어즈’는 지난 2일엔 시각장애인 소프라노 윤선혜씨와 ‘유 레이즈 미 업’ 등 7곡을 불러 감동을 선사했다. [사진 여성중앙]

지난달 29일 ‘2013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강원도 평창의 용평돔. 긴장감이 흐르는 무대 가운데로 신랑 신부가 등장했다. 이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뿔싸, 사람이 아닌 ‘눈사람’이다. 친구들과 다르게 태어나 모든 게 쉽지 않은 눈사람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세상의 벽을 실감하며 무대에 쓰러진다. 이때 힘을 잃고 서서히 녹아가는 그의 눈앞에 눈꽃 요정과 친구들이 나타나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어머니의 기도도 계속된다. 용기를 얻은 눈사람은 다시 일어서고, 무대 중앙에서 “넌 할 수 있어, 우린 할 수 있어, 뜨거운 가슴으로”라는 노래가 들려온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자는 스페셜올림픽의 주제곡 ‘투게더 위 캔(Together we can)’이 용평돔을 가득 채우자 4000여 명의 관객은 물론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와 미얀마 민주화의 꽃인 아웅산 수지 여사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날 가수 이적, 기타리스트 이병우, ‘슈퍼스타K4’의 허니지·안예슬·이지혜 등과 함께 개막식의 피날레 무대를 장식한 이들은 나눔 합창단 ‘오! 싱어즈’였다.

푸념이 설렘으로

오싱어즈 지휘자 안우성씨

 남녀 혼성인 ‘오! 싱어즈’는 1년이 갓 지난 새내기 합창단이다. 2011년 10월 창단해 모두 다섯 차례 공연해 온 이들의 목표는 ‘나눔’이다. 지난해 6월 한국여성재단이 주최한 ‘나눔의 별, 희망의 은하수가 빛나는 밤’에 초청돼 성 평등사회 조성을 위한 기부를 독려했고, 같은 해 10월 포천의 지적장애인 시설 ‘해뜨는 집’에서 공연과 봉사를 하는 등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데 앞장섰다.

 시작은 미약했다. ‘나눔’이라는 컨셉트 대신 ‘우린 왜 이렇게 살지’라는 한탄이 모태가 됐다. “여성중앙 지면에 1년간 연재된 ‘재미있게 사는 옆집 여자’ 칼럼이 있어요. 농구하는 여자들, 야구하는 여자들, 심지어 바다에서 수영하는 여자들까지. 신통하게도 매번 충전 완료된 것처럼 재미나게 사는 아줌마들이 등장하더라고요. 나랑 너무 다르게….”

 ‘오! 싱어즈’ 단장인 안지선 여성중앙 차장은 합창단 창단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늘 마감에 쫓겨 사는 기자에게 ‘힐링 타임’은 그림의 떡이었다. 안 단장은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게 기자의 일이지만 정작 나는 산적한 업무 때문에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푸념이 쌓이자 놀라운 에너지가 됐다. 세상사가 늘 그렇듯 누군가의 한마디에 합창단이 탄생했다. ‘우리 노래나 해볼까’라는 제안에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과 여성중앙 독자들, 잡지에 등장했던 유명인들과 광고 브랜드 담당자들이 선뜻 모였다. 2011년 12월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여성중앙 인문학 콘서트’에서 화합의 노래를 불러보자는 취지였다.

 한데 석 달간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멤버들 각자 스트레스와 상처가 치유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설렘, 화음을 만들 때의 희열, 노래방의 에코가 만들어준 가짜 목소리가 아닌 진짜 내 목소리를 듣는 기쁨 덕분이었다.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이들에게 간절히 손꼽아 기다리는 일이 생겼고, 이 에너지를 계속 끌고 가기 위해 ‘나눔’이란 키워드를 장착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방전된 몸을 이끌고 서울 압구정동 세실아트홀 연습실에 모여 에너지를 재충전해 가길 1년. 지난 연말 3기 오디션까지 마친 합창단은 이제 50여 명의 정예 멤버로 이뤄진 ‘건강한’ 합창단으로 탈바꿈했다.

 단원들의 면면도 화려하고 다양하다. 개그우먼 곽현화, 배우 양주호 등을 비롯해 광고회사 국장, 아이돌을 교육하는 SM아카데미 대표, 육아에 올인하던 전직 카피라이터 아줌마, JTBC 앵커, 은퇴한 신문기자, 모피·화장품 등 국내 대표 생활브랜드 홍보담당자, 암 치료 중이던 주부, 출판사 대표, 건축회사 직원에 일상이 분주해 약속 잡는 것 자체를 스트레스로 여기던 잡지 기자까지. 갑을 관계, 상하 관계, 거래 관계에 있던 이들이 ‘노래’ 하나로 동료가 됐다. 이젠 연령도, 직종도 점점 다채로워졌다. 단원들 사이에서 “우리가 힘을 합하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겠다”는 말도 나온다.

매주 합창 연습은 삶의 오아시스

 단원들 앞에 지휘자 안우성씨가 서면 ‘화룡점정’이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국립음대 성악과를 최우수 졸업한 안씨는 주빈 메타가 상임 지휘자로 있던 뮌헨 국립오페라단의 솔리스트를 지낸 실력파다. 단원들은 “지휘자를 잘 만난 게 합창단 최고의 복”이라며 “어디서도 받지 못할 고급 음악 교육을 받아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안씨는 단원들의 목소리를 최고의 악기로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노래방에서 찢어지게 고음을 내던 목, 성대를 상하게 하는 창법들은 다 내려놓고 ‘소리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법’을 가르쳤다. 잘못 쓰던 기계를 제대로 길들이는 심정으로 자세부터 턱의 위치, 음의 끝 처리, 감정 처리, 시선 처리까지 지도했다. 두성과 가성에 의존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점도 설명했다. 안 단장은 “학창 시절 음악 교육을 받고 악기 레슨도 받았지만 정작 자기 인생에서 노래를 제대로 배워본 경험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무언가를 ‘제대로’ 배운다는 환희에 들떠 있다”고 말했다.

 통상 대회 출전을 목표로 하는 일반 사회인 합창단이나 찬양을 위주로 하는 종교단체 합창단과 달리 나눔을 목표로 하는 것도 ‘오! 싱어즈’만의 특징이다. 알토 파트 김재희 단원은 “20년간 이런저런 합창단 활동을 해왔는데 나눔 활동 자체에 목표를 두고 무대에 서는 합창단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대회 출전을 염두에 두면 출전곡 서너 곡만 집중적으로 연습해 지루하고 중압감도 많은데 우리는 경연대회를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다 함께 즐기는 데 집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무대마다 새로운 협연을 기획한다. 합창과 어우러져 긍정적인 에너지를 낼 수 있다면 누구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해 6월 공연 때는 방송인 박경림씨의 유일한 히트곡인 ‘빠져빠져’를 합창 버전으로 편곡해 박씨와 함께 공연했다. 같은 해 10월 ‘해뜨는 집’ 공연에서는 서울 와이즈발레단과 협연했다. 합창단의 노래에 맞춰 발레리나들의 손과 발끝이 움직이자 400여 명의 지적장애인 관객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관객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앙코르를 외쳤다. 모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스페셜올림픽 개막식 때도 7곡을 함께 불렀다.

 음악은 본래 삶의 갈증을 풀어주는 완전체라 했던가. ‘집-회사-술’의 트라이앵글에서 매주 목요일의 합창 연습은 이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이들은 다음 주 목요일 저녁에도 자신들만의 작은 오아시스를 찾아갈 계획이다.

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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