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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규 칼럼] 2020년 달에 태극기 휘날리려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08호 30면

대기권 너머 우주를 내가 처음 본 때는 1969년 7월 20일이다. 흑백 진공관, 고물 TV에 나타난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장면에서다. 화면은 흔들리고 우주인 동작도 굼떠 국민학생인 내겐 큰 흥미를 못 줬던 것 같다. 요즘은 공상과학(SF) 영화의 영향으로 다른 별을 옆 동네 가듯 여기지만 실제 달 여행은 지금도 어렵고 그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국의 그런 성취가 ‘스푸트니크 쇼크’ 때문에 가능했다는 건 오랜 상식에 속한다.

로버트 로우니우스가 쓴 스푸트니크와 우주 시대의 기원에 따르면 쇼크는 말 그대로 들이닥쳤다. 57년 10월 4일 금요일, 워싱턴의 주미 소련대사관 리셉션에 모였던 미국 과학자들은 소련 과학자가 “우리가 곧 위성을 쏜다”고 하자 허풍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그날 진짜로 인류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됐다. 한 달 뒤쯤 ‘라이카’라는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2가 또 발사됐다. 54년 12월부터 소련 정부가 전력투구해 이뤄낸 성과였다.

미국의 절망과 분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향했다. ‘웃기만 하는 바보’ ‘골프만 치는 대통령’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미 정부가 급히 그해 12월 6일 첫 우주선을 쐈지만 주저앉았다. 내부 논의도 갈팡질팡. 가닥은 이듬해 2월 4일 잡혔다. 아이젠하워는 항공우주국(NASA) 창설을 결정했다. NASA의 탄생이다. 그래도 소련은 계속 펀치를 날렸다. 61년 4월 21일 유리 가가린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 궤도를 선회했다. 그 자긍심은 지금 모스크바시 레닌스키 대로 초입에 하늘로 치솟은 가가린 동상으로 늘씬하게 형상화돼 있다. 첫 위성, 첫 우주인 경쟁에서 진 미국은 절치부심했다.

40대의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61년 5월 25일 “10년 안에 사람을 달에 착륙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아폴로 계획을 국가 사업으로 만들어 무려 200억 달러를 투입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91달러였을 때다. 그가 암살되고 대통령이 존슨, 닉슨으로 바뀌어도 목표는 안 흔들렸다. 교육 시스템이 개혁됐고 나라가 업그레이드됐다. 8년2개월 뒤 암스트롱은 달에 착륙했다. 그 역사를 초가와 우물이 곳곳에 남아 있던 촌스러운 서울에서 내가 본 것이다.

이런 스푸트니크의 교훈을 우리 현실과 대조하면 씁쓸하다. 나로호 성공 뒷얘기엔 “예산도 박하고 국민과 정치권의 이해도 적어서 어렵다”는 내용이 많다. 나로호에 들어간 돈을 놓고 ‘뭐하러 그러는데’라는 시비도 끊이지 않았다. 민심도 성공은 기대해도 과정엔 냉정했다.

왜 나로호 성공에 열광하나. 우주 클럽 가입, 통신 위성, 로켓 기술 확보 같은 것 때문인가. 아니다. 그건 부수적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국가 미래의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미래를 열고 먹거리와 일자리를 주며 안보도 지켜준다. 휴대전화도 구글도 과학이다. 우주과학은 과학의 중추이며 후방 효과도 크다. 나로호 발사는 그런 기대의 압축이다.

그러나 우울해진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거듭해도 충격은 잠깐, 국민적 절치부심은 약할뿐더러 단발성이다. 중국의 유인 우주선 발사 성공 때도 잠깐만 소란했다. 충격을 국가 목표로 전환하고 비전으로 재창조하는 리더십도 없었다. 스푸트니크를 위한 흐루쇼프의 결정, NASA를 만든 아이젠하워의 결정, 달 착륙을 제시한 케네디의 비전 같은 당찬 것들이 안 보인다.

그래서 박근혜 당선인에게 기대를 건다. 지난 대선 유세 때 그는 “2025년으로 잡힌 달 착륙선 계획을 2020년으로 앞당기겠다”고 했다. 달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리더십이 필수다. 미·소가 벌써 보여줬다. 필요하다면 ‘북한의 은하-3호 충격’을 이용해서라도 국가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당선인의 공약 사이트에 먹고사는 문제는 꽉 찼지만 ‘달 비전’은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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